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화 Oct 15. 2024

30. 수학자의 반성

수현(4)






오후 강의를 위해 대학교로 돌아왔습니다. 수업이 끝날 무렵까지 학생들의 표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얼굴입니다. 제가 보아서는 30명 남짓의 학생들 중에 두세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강의를 따라오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이 비교하게 됩니다.


대학생들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혼자서 공부를 하고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수학이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이해하기 힘든 과목도 아닌데 말입니다. 마음이 별로 안 좋습니다. 학생들의 태도 때문에 강의할 맛도 나지 않습니다. 흐름이 뚝뚝 끊기다보니 학생들도 몹시 지루한 듯합니다. 그냥 오늘은 5분 일찍 끝내야겠습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혹시 질문 있나요?”



아무도 질문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한 학생이 손을 듭니다. 내심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그래도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학생이 적어도 한 명은 있는 듯합니다. 주변 학생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입니다.


“네, 무슨 질문인가요?”


“교수님, 너무 어려워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저는 몹시 당황스럽습니다. 차라리 솔직하게 무지를 고백하는 편이 더 나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머지 학생들 모두 하나 같이 슬픈 표정을 지으며 저를 바라봅니다. 저는 약간 짜증도 납니다. 잠시 제 대학시절을 떠올리다가 입을 뗍니다.


“여러분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강의실의 학생들을 쭉 훑어보고는 말을 잇습니다.


“여러분, 공부는 하고 있나요? 여기에 열심히 하고 있는 학생도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저는 물을 수밖에 없어요. 정말로 공부하고 있나요?”


어느 한 명도 답하지 않습니다. 그저 저를 바라볼 뿐입니다.


“혹시나 착각하고 있는지도 몰라서 다시 말하자면, 수학은 원래 어려워요. 여러분들이 살면서 만나는 대부분의 문제만큼이나 어려워요. 여기서 중요한 건, 저는 확실하게 어렵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거예요. 어렵다, 쉽다, 이런 판단을 할 수 있으려면 우선은 열심히 해봐야 해요. 그 후에야 어려움을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제가 하는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진지하게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어렵다거나 쉽다거나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저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말을 붙입니다.


"물론 저도 매일 경험해요. 수학을 하는 건 아주 힘든 일이에요. 그래서 그냥 수학이 어렵다고 말해버리고 증명을 위한 생각을 끝내고 싶어요. 그런데 그건 하기 싫을 때 말하는 핑계이고, 동시에 어느 누구든 쉽게 도달하는 회피 방식에 불과하죠."



학생들의 얼굴을 둘러보며 말합니다.


"저는 다시 묻고 싶네요. 여러분, 수학이 정말 어렵나요? 어렵다고 이름을 붙여놓고 마냥 하지 않는 건 아니고요? 저도 여러분과 같은 때를 지났어요. 수학은 어려워요. 저도 인정해요. 그런데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열심히 해보는 수밖에요. 여러분은 전공으로 수학을 선택해서 이 자리에 앉아 있죠.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말하는 어렵다고 말하는 그 수학이 자신에게도 정말 어려운지, 아니면 쉬운지 한 번 확인해봐야 하지 않겠어요?”


저도 모르게 말을 쏟아낸 듯합니다. 학생들의 표정은 가지각색입니다. 강의를 듣는 것처럼 무료한 표정, 이상하게 울상인 표정, 시계를 보며 초조해하는 표정, 알 수 없는 무표정. 그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제 그만 말을 그쳐야겠습니다. 저는 칠판에 오피스 아워를 적고 서둘러 정리합니다.


“우리 다 같이 열심히 해보죠. 이 시간에는 제가 항상 연구실에 있으니까,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세요. 시험 문제는 수업 중에 다룬 것 위주로 쉽게 낼 거니까, 강의만 열심히 들어도 충분할 거예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수고했어요.”


강의가 끝나자마자 연구실로 돌아와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연구실은 유독 적막합니다. 학교에 아무도 없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듭니다.


창밖으로 교정을 내려다봅니다. 거니는 사람이 몇 보입니다. 저들은 무슨 이유로 학교에 남아 있을까 상상하다가, 문득 제게도 아직까지 학교에 남아 있는 이유를 자문합니다. 저는 수학자이고, 수학을 연구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연구가 손에 통 잡히지 않습니다. 시간과 정신력을 다른 데 쏟고 있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지만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아무리 귀찮더라고 꼬박꼬박 밥은 챙겼는데, 오늘은 강의를 마친 후에 식사도 하지 않았고 논문도 보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학생이 찾아와 질문이라도 한다면 좋으련만, 역시나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힘껏 기지개를 펴 봅니다. 여전히 힘이 없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가는 오늘 하루를 통째로 버리게 생겼습니다.



연구를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소파 위에 방석을 깔고 그 위에 편안하게 앉습니다. 알람을 맞추지 않은 채로 호흡을 고르다가 명상을 시작합니다.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며 차근차근 감각을 옮겨봅니다.


머리와 얼굴, 목과 어깨, 팔과 손, 가슴과 배, 등허리와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 발등, 발끝.


다시 거꾸로 반복합니다. 발끝에서 머리로 감각을 이동시킵니다. 지금껏 수행한 모든 시간들이 저를 천천히 이끌어갑니다. 딸아이의 얼굴이 떠올라도, 창피한 과거의 일면이 떠올라도 호흡으로 중심을 잡았던 수련의 경험이 저를 굳세게 만듭니다. 집중합니다. 기민한 마음으로. 주의 깊은 마음으로. 흔들리지 않는 진중한 마음으로.


직면하는 어둠. 숨막히도록 깊은 암흑. 나를 가라앉히는 씁쓸한 호흡.



반복되는 호흡의 끝에서 다시 무채색의 전경이 잠시 어른거립니다. 아주 흐릿한 구멍,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제게 밀려오는 감정을 지켜보면 아주 중요한 것이 분명합니다. 벅차오릅니다. 마냥 슬프고 버겁습니다. 숨을 길게 빼며 악착같이 감각을 유지합니다. 이전보다는 조금 더 낫습니다. 알아차리고 지켜보고 흘려보내고 받아들이고, 다시 알아차립니다.


목울대에 육중한 무언가가 자리 잡은 것처럼 침을 삼키기도 힘듭니다. 버티지 못해 호흡이 흐트러집니다. 결국 맨 처음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익숙한 암흑, 다시 그 앞입니다.


설마 이게 제 마음인가요. 제 마음 안에 과연 무엇이 있는 걸까요. 어렵기만 합니다. 습관처럼, 그리고 연구처럼 그 대상을 정확히 정의내리고 이름을 붙이려 시도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 광경을 마주하는 것만 해도 몇 번째인지 모릅니다. 계속 그 장면이고, 또 그 장면에서 멈춥니다. 꿈처럼 잊히지도 않습니다.


그럼 저는 앞으로 계속 이 불분명한 정경에서 헤어 나오지도 못하고 알아 가지도 못한 채로 계속 버텨야만 하는 건가요. 갇힌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오도 가도 못하도록 얽매는 굴레입니다. 연구자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호흡을 가다듬으며 평정심을 회복합니다. 다시 명상을 이어갑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어쩌면 내가 너무 교만한 것이 아닐까.


차가운 수학의 명제를 대하듯 이 문제도 온종일 마음 한 편에서 다루어도 괜찮을 것이라 착각했나 봅니다. 스스로 부끄러움 없이 열심히 시도하고 시도하며, 쉬지 않고 다시 시도하면 마침내 제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미련하게 생각했나 봅니다. 오후 강의 중 학생들의 얼굴들이 불쑥 떠오릅니다. 그들에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제가 뭐라도 되는 양 가르치듯 말한 것 같습니다.


수학이야 제 전공이지만, 그 이외에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래요. 이 명상도 그렇습니다. 이건 제 전문분야도 아니면서, 제 방식대로 고집을 피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겠습니다. 박 선생님이 괜히 명상 모자를 권한 것은 아닐 겁니다. 아무래도 그의 지도와 권면을 따르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눈을 뜨고 어깨와 가슴이 크게 오르도록 숨을 고릅니다. 몸을 털고 일어나 선생님에게 건네받은 명상 모자를 찾습니다. 전원을 연결하고 모자를 착용한 채로 다시 방석에 앉습니다. 머리 주위에 감각이 생경해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정자세를 취합니다. 어깨에 힘을 빼고 팔을 가지런히 무릎에 올립니다.


그동안 혼자서 정독한 책자 속의 문장들도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정녕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박 선생님에게 지도받은 말씀들이 새록새록 기억납니다. 여러 방식으로 설명했지만, 결국 하나의 강령에서 비롯된 것일 뿐입니다. 어떤 지식도 체험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사실 우리는 각 개인에게 속한 경험을 표현하기 위해 다른 형태의 지식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생각에 닿자 자유롭습니다. 그렇게 제하고 제하면 결국 남는 것은 나 하나, 아니, 제가 몸소 겪을 바로 앞의 세상 하나가 남습니다. 그 앞에 저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자만이 아닌 겸허의 마음으로, 소유가 아닌 공허의 마음으로, 지금까지 제가 일구어온 것, 제게 속한 그 무엇이 아니라 오직 매순간에 드나드는 호흡에 의탁하는 심정으로 새롭게 명상에 임합니다.





31. 하얀 행성과 검은 명상 _ 진영&수현의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마음의 위상 1부 보러가기 (01 - 30화)
마음의 위상 2부 보러가기 (31 - 42화)


이전 29화 29. Sitting low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