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의 시간 / 사랑 003
상대방을 사랑할 때 제일 먼저 변하는 태도는 무엇일까?
아마도 초점이 바뀌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를 향한 초점이 상대방을 향하고 상대방의 유익에만 관심을 쏟게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정의한 사랑에도 그 초점이 온통 내가 아닌 상대방을 향하고 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3-7).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말은 ‘상대방의 유익을 구한다’라는 뜻이다.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되 자신의 목숨까지 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고, 그것이 사랑의 완성이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이런 사랑을 주문하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마 13:34). 예수님의 사랑은 죄를 범한 인간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대신 내어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주문하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상대방을 사랑할 때 갖게 되는 두 번째 변화는 무엇일까? 상대방과 가까이하고 싶어진다. 가까이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접착제처럼 항상 붙어있으려고 한다. 우리가 쥐나 뱀을 보면 몸서리치면서 멀리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들을 싫어하니까, 극도로 혐오하니까 그렇게 한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은 뱀을 온몸에 칭칭 두르기도 한다. 왜 그럴까? 그 뱀이 좋아서, 그 뱀을 사랑하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다.
뱀과 같은 파충류를 사랑해도 이런 행동을 하게 되는데, 하물며 그 대상이 여호와 하나님, 그것도 나에게 힘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을 향해 우리가 어떤 사랑을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두말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마치 혐오스러운 동물을 대하는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일주일 내내 방구석 저만치에 처박아놓는가 하면,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어본 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그 날짜조차 기억하기 어렵다. 이 정도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혐오하는 것이다.
시편 18편은 다윗의 시이다. 그는 첫머리에서부터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여기에서 ‘사랑한다’라는 말은 ‘깊고 부드럽게’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여호와의 법을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하고,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다고 하였다(시 19:10). 그래서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하였다고 고백하였다(시 42:1).
다윗의 고백에는 앞서 언급한 사랑의 태도 두 가지가 모두 들어 있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이러한 사랑은 밧세바를 범한 사건 외에는 평생토록 유지되었다(왕상 15:5). 이런 다윗의 모습은, 우리를 비치는 거울이 된다. 그 거울 앞에서 다윗과 겹치지 않은 것은 제거하여 온전한 데칼코마니를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