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의 시간 / 사랑 001
느헤미야 1장은 페르시아 제국의 아닥사스다 왕 20년(기원전 444년)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그때 느헤미야는 유다에서 온 형제인 하나니에게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었다. 이에 그는 예레미야에게 그곳의 실상을 이렇게 들려주었다.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3절).
하나니가 전한 예루살렘과 유다 도(province)의 상황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스룹바벨이 주도한 1차 포로 귀환 이후 기원전 515년에 성전이 재건되고, 기원전 458년 에스라가 주도한 2차 포로 귀환 이후 종교 개혁이 이루어졌지만,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느헤미야 당시의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대적인 주변국들이 예루살렘 성의 재건을 끊임없이 방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힘까지 동원하여 그나마 공사가 진척된 성벽을 허물고 성문들을 불태웠기 때문에 일어났다. 성벽이 허물어지고 성문이 불탄 상황은, 대적들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가운데 있는 백성들도 평안을 누리기는커녕 큰 환난과 능욕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였다(4절).
지금 우리 이웃이 처한 상황을 느헤미야 당대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말하면 억지 주장이 될까? 하지만 사도 베드로의 경고에 비추어보면 그것이 억측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유다를 괴롭혔던 대적들이 더 무서울까, 아니면 대적 마귀가 더 무서울까? 당연히 마귀가 더 무서운 존재일 것이다. 유다의 대적들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그들 역시 사람이다. 그에 비해 마귀는 인간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무서운 존재이다. 그는 배고파 우는 사자처럼 먹잇감이 보이기만 하면 삼키려고 달려들기 때문에, 그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우리의 이웃은 느헤미야 당대의 백성들보다 더 처참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분명 느헤미야 당대 사람들과 비교할 때 더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당시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성문이 불탔다면, 지금은 애초부터 무너질 성이나 불탈 성문조차 갖추어지지 않았다. 우리의 이웃은 마귀의 공격에 완전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고, 자신이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마귀로부터 큰 환난과 능욕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웃은 성경 말씀대로 생명이 아닌 죽음 가운데 처해 있고(롬 3:23), 그 후에는 구원 대신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히 9:27).
하지만 하나님을 먼저 믿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설령 인식하고 있다 하더라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팔짱만 끼고 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은 동족들의 비참한 상황 앞에서 주저앉아 슬피 울던 느헤미야의 모습과 비교할 때 너무도 대조적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대조적인 모습을 클로즈업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도 느헤미야가 느꼈던 슬픔을 회복하라는 데 있다고 믿는다. 바로 그런 태도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웃의 비참한 상황에 대해 문제의식을 지니게 하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또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