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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택 Oct 28. 2020

안식일 오류에 빠진 바리새인들

산책의 시간 / 인격 003


  마가복음 3장에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있었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그곳에는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 그분이 안식일에 그의 병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었다.


  앞서 밀밭에서 주님께 안식일의 참 의미를 새롭게 알게 되었지만, 그래서 그분이 안식일의 주인(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지만(2:23-27), 그들의 태도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 즉 그분을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손 마른 사람을 한가운데 일으켜 세우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셨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4절). 당연히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는 이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의 구전 율법(할라카)에 따르면, 안식일에 생명이 위급할 때 안식일 준수보다 치료를 우선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손 마른 사람의 처지가 정말 위급한 상황이면 안식일에도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다고 대답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앞에는 두 가지 난제가 놓여 있었다.


  첫 번째 난제는, 손 마른 사람이 처한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것이었다. 그 상황을 위급한 상황으로 볼지, 아니면 안식일이 지난 뒤에 도와줘도 되는 상황인지 판단해야만 하였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화급을 다투는 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이 잠잠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예수님의 질문 속에 들어 있는 내용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선행을 생명을 구하는 것으로, 반대로 악행을 죽이는 것으로 간주하셨다. 그러므로 비록 화급을 다투는 일이 아닐지라도 손 마른 사람을 도와주지 않으면 악이 되고 사람을 죽이는 일(살인)이 되기 때문에, 안식일이 지난 다음에 도와줘도 된다고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두 번째 난제는, 어떻게 대답해도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만약 손 마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대답하면, 자신들이 규정한 안식일 법을 스스로 어기게 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고 손 마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대답하면, 그것은 앞서 예수님이 규정하신 대로 그 사람에게 악을 행하고 죽이는 것이 되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악한 자’, ‘살인자’라는 비난을 받을 것이 빤하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잠잠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모순덩어리’였고, 율법을 내세워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악한 인간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런 모순과 사악한 행위를 인정하고 회개하기보다는 잠잠함 속에 자신들의 일그러진 모습을 숨기기에 급급한 사람들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그렇게 완악한 것에 대해 탄식하시면서 분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셨다(5절).


  그들이 이런 입장에 설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다고 착각하였기 때문이다(2:27). 다시 말해서 율법을 이웃을 사랑하는 데 적용하지 않고 오히려 이웃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들로 진퇴양난의 모순에 빠지게 하였다.


  지금 우리는 그들과 얼마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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