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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실 Jan 05. 2024

둘이 떠나 하나가 돌아오다

희미한 상아 1

 상아가 언제쯤 자랄까. 우리 아빠를 닮는다면 나도 아주 멋진 상아를 가지게 될 텐데.

 나는 아빠를 그렇게 기억한다. 상아의 빛과 같이 희미하게. 분명 그렇지 않을 텐데 아빠의 상아에 대롱대롱 매달리고 타고 놀던 시절이 아주 오래된 것만 같다. 지금까지도 우리 아빠보다 크고 위엄 있는 것을 가진 코끼리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엄마는 처음 아빠를 보았을 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하곤 하셨다.

 "알리 밖에 보이질 않았지. 그 많은 수컷이 있었지만."

 우리 엄마의 주위에서는 치열한 구혼장이 펼쳐졌다고 했다. 대대로 물려온 자리로 다음 우두머리는 우리 엄마, 스바비에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저마다 긴 코와 육중한 몸집을 뽐내고 있을 때 엄마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은 것이 바로 알리, 우리 아빠였다. 영롱한 빛의 길고 곧은 아빠의 상아.

"엄마, 목욕이 하고 싶어요. 목욕한 지가 정말 오래된 것 같아요."

"그래, 이 풀들을 마저 먹고 가자꾸나. 갈수록 깨끗하고 싱싱한 풀을 찾기가 부쩍 어려워지는 것 같으니."

 엄마는 자신이 이끄는 무리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엄마의 눈은 깊고 맑았다.


 엄마의 말은 나도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다. 비단 메마른 땅뿐만이 아니라 며칠 전 우연히 듣게 된 이야기가 그랬다. 낮잠을 자다가 깨었을 때 어른들이 소곤소곤 나누던 대화를 주워들었다. "끔찍도 하지…""그러게, 듣고도 믿을 수가 없어""어떻게 그런 일이…."

 바타카 아저씨네 이야기였다. 우리 무리가 거닐던 주변의 초원들 상당 부분은 이미 갈색 땅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에게는 이제 쿨레 숲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다음 서식지 탐색을 위해 발이 빠른 바타카 아저씨네가 길을 떠났었다. 하루 거리의 서식지 탐색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바타카 아저씨네가 날이 저물기 전에 돌아올 거라 기대했던 우리는, 저녁이 되어도 오지 않는 그들 부부를 기다리며 저마다 불안을 안은 채 잠에 들었었다.

 유독 깊은 어둠이 드리운 밤이었다.


 "알겠어요, 엄마. 열심히 먹고 얼른 자랄 거예요!" 나의 말에 빙긋이 웃는 엄마였지만 슬픈 눈이었다. 마치 바타카 아주머니의 눈처럼.

 날이 밝고 우리 모두 그들이 떠나간 방향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어느 순간 저 멀리서부터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고, 하나둘 안도감을 담은 말들을 했다. 희망의 웅성거림은 그것이 하나의 형체임이 분명해지며 일순간 정적이 되었다.

 둘이 떠나 하나가 돌아오고 있었다.

 바타카 아주머니가 두서없이 설명하는 말 중 대부분을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혼자 남은 바타카 아주머니의 혼이 빠진 듯한 눈만이 나의 마음을 짓누르며 깊이 자리하게 된 것이었다.

 "엄마, 얼른 커서 내가 엄마를 지켜줄게요!" 나는 엄마 다리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애교를 부렸다. 그렇게 하면 엄마의 눈이, 내 마음이 덜 슬퍼질 것 같아서였다. 제법 널찍하게 자란 내 귀가 펄럭거렸다.

 "잘 들어, 에텔라." 다정하고도 분명한 엄마의 목소리에 나는 뛰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건 엄마가 하는 거야. 엄마가, 자식을 지키는 거야."


 물놀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활동이었다. 숲이 만들어낸 짙은 녹색의 그림자가 호수에 드리워지고 호수의 깨끗하고 맑은 물은 숲의 갈증을 채워주는, 쿨레 숲과 빌레 호수. 그 둘은 서로를 의지하며 그렇게 이어져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모습은…

 "엄마…."

 이곳을 서식지로 삼고 있었기에 위치를 알고 있었다 뿐이지 이전의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린 광경에 우리는 모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울창하던 숲의 자리엔 짧다란 나무 밑동만이 듬성듬성 있고 호수는 단단한 무언가로 막혀 흉물스러운 모양새였다. 옅은 풀색의 싱그러움, 초록의 생명력은 사라졌다. 호수 물을 코로 빨아들여 엄마가 내뿜어주던 물줄기도 미끄럼 삼아 놀던 아빠의 상아도 없다. 질어진 흙을 나에게 던지며 진흙 놀이를 해주던 바타카 아저씨도, 이제는 없는 것이다. 아저씨의 오른쪽 앞발엔 커다랗게 흰 반점이 있었다. 아저씨가 장난을 걸어오면 나도 아저씨의 그 흰 반점 모양을 따라 흙을 칠하곤 했었다. 그렇게 하면 다른 곳과 피부색이 맞춰졌고 꼭 메워지는 것 같은 그곳을 보며 함께 웃곤 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빼앗기고 있었다. 땅과 풀, 가족과 친구들. 소중한 기억들, 우리의 삶… 우리에게 남은 것이 몇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때가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그 순간 머리 위로 엄청난 굉음이 쏟아지며 날개 달린 거대한 비행 물체가 지나갔다. 자연에서 볼 수 없는 크기와 모양, 소리와 속도였다. 엄마는 몇 번인가 눈을 끔벅거렸고 이내 질끈 감았다. 눈가에 수십 겹의 주름이 지어졌고 가장 예쁘게 휘어있는 주름의 끝에 반짝이는 눈물이 맺혔다. 그 흐르지 않는 눈물은 내 마음으로 떨어졌다.

 설명할 수 없는 두려운 예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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