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는 것들
간단히 저녁식사를 마친 후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길을 나섭니다. 조금 일찍 집에서 나오면 석양을 볼 수 있고, 조금 늦게 나오면 기웃기웃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합니다. 다이어트를 위한 운동이 목적이긴 하지만 혼자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경보처럼 빠르게 걷기도 하지만 산책하듯 흐느적흐느적 걷기도 합니다.
가로등 불빛에 내 그림자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가끔 바람에 날리는 거미줄이 기분 나쁘게 얼굴을 습격하기도 하지만, 먹고살려고 실을 뽑아 그물 좀 만들라 했더니 난데없이 나타난 인간 한 마리가 툭 치고 가버리니 거미도 짜증 날만 합니다. 나도 짜증 나긴 마찬가지니까 일단 서로 디스 하지 않기로~!
산책 나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드시 살을 빼고 말리라'하면서 열정적으로 조깅하시는 분, 운동인지, 산책인지, 지나가는 행인인지 어정쩡한 모습으로 핸드폰만 들여다보면서 걷고 계신 주제가 명확하지 않은 분, 두근두근 썸을 좀 타는 것 같은 작은 연인들, 타아박 타아박 짧은 걸음으로 넘어질까 염려되는 노부부의 뒷모습으로 "꽈라무라이에다띠까라마카니, 뀨라이 라이따 찌찌뽕" 아시아계 외국인의 대화도 스치듯 지나갑니다.
살다 보면 하루하루
힘든 일이 너무도 많아
가끔 어디 혼자서
훌쩍 떠났으면 좋겠네
수많은 근심걱정
멀리 던져버리고
언제나 자유롭게
아름답게 그렇게 우우
내일은 오늘보다
나으리란 꿈으로 살지만
오늘도 맘껏 행복했으면
그랬으면 좋겠네
권진은의 노래 <살다 보면>처럼, “걷다 보면” 세상을 보는 내 눈이 세상 속에서 나를 보는 눈으로 바뀌고, “걷다 보면” 고마운 사람도 떠오릅니다. “걷다 보면” 힘들게 살다 떠나가신 부모님 얼굴도 생각이 납니다. “걷다 보면” 1년을 돌아보고, 10년을 돌아보고, 인생을 한 바퀴 돌아보고 올 때도 있습니다. 한글을 늦게 깨쳐서 소리 나는 대로 글씨 쓰던 어릴 적 내 모습도 보이곤 합니다. “거따보면” 똑똑해쓰면 조케씀니다 그래쓰면 조케슴니다. ㅎㅎ
영화 <인생 >은 중국 장이모(张艺谋) 감독의 1994년작 영화입니다. 저는 "인생"이란 단어보다 원래 제목이 더 마음에 와닿습니다. 원제(原題), 훠저(活着)는 글자대로 해석하면 "살아있는 것", "숨 쉬고 있는 상태", "삶을 유지"하는 것으로 읽힙니다.(주1) "着"는 중국어로 지속의 의미가 있습니다. 뜻글자의 매력이 느껴집니다. 글자만 봐도 영화 한 편 보는 것 같이 해석할 수 없는 무수한 감정이 뽀글뽀글 올라옵니다. 개인과 가정, 시대와 역사가 뒤엉켜 이 땅 위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 우리네 인생에 한없는 연민(憐憫)을 느낍니다. 나중에 나중에 천국 가면 출생연도별로 띠모임을 갖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건의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딸이 21년 전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을 만났습니다. 21년 전에 함께 찍은 사진을 찾아내서, 21년 후, 오늘 사진과 나란히 늘어놓아 봅니다. 인생은 "살아있는 상태를 유지"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집에 돌아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소형 안마기와 뻐근한 무릎 통증을 허리로 느끼며 아고고고... 으쌰! 침대에 누워봅니다. 저는 오늘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1 : 글쓴이의 개인적인 해석입니다. 사전적 의미는 틀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