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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엔디 Jul 09. 2024

아주까리 아니고 야리끼리

안전한 근로환경을 위한

  공사현장에선 아직도 일본식 건설용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데스라, 우와낑, 게꼬미, 기리바리, 우마, 하스리 등 익히 들어본 말도 있고, 생소한 단어도 있을 겁니다. 그래도 위엣것들은 초급단어(?)라 건설현장에서 종사하시는 분은 아마 대부분 알아듣고 의사소통이 됩니다. 심지어 관리직이나 기술직도 일본식 건설용어를 사용하면 "아, 이분은 현장경험이 풍부하고 경력이 좀 된 것 같다"는 인상을 줄 수 있어서 회의를 하거나 작업지시를 할 때 의도적(?)으로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합니다.


  "야리끼리"는 遣り切り(やりきり)어떤 일을 끝낸다는 뜻인데 보통 건설현장에서 주어진 일을 끝내면 시간에 상관없이 퇴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정해진 양을 완수하면 하루 일당을 보장해 주는 일종의 약속(딜)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관리자와 노무자사이에 치열한 수싸움이 시작됩니다. 관리자는 노동량과 시간을 계산해서 손해보지 않는 일 양(量)을 책정합니다. 정해진 일 양(量)을 성실하게 완수하면 좋은 일이지만 생각보다 너무 일찍 끝나서 노동자가 점심도 먹기 전에 퇴근하는 모습을 두 눈 뜨고는 볼 수 없거든요. ㅎㅎ 노동자는 '야리끼리'를 제안받고 자신의 근육량과 체력의 소모, 그날의 몸 상태를 미적분과 삼각함수, 인체공학적 시뮬레이션을 통해 순식간에 계산해 내고 일찍 퇴근할 수 있겠다는 결과치가 나오면 "야리끼리"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공사용 모래를 산 위로 올려야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10~20kg 되는 모래를 산 위 정상까지 올려다 놓아야 합니다. 장비가 올라갈 수 없는 곳이라 무조건 인력이 필요한 상황이라 전날 한 사람이 근무시간 내에 올릴 수 있는 양을 계산해 보았습니다. 직접 어깨에 짊어져보고 걸어가면서 한 사람이 하루에 몇 번을 오르내릴 수 있을까 계산해 보니 3명이 오후 3-4시까지 작업을 하면 크게 손해보지 않겠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3명의 인력에게 '야리끼리'제안을 했습니다. 평지와 경사지에서의 소운반은 차이가 큽니다. 눈으로 보기엔 양이 얼마 안 되고 쉬워 보여도 막상 해보면 여간 녹록지 않은 일입니다. 그 제안이 쉬워 보였는지 작업자 3명이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내심 흐뭇한 미소로 '내 계산으론 아마 3시 넘어서야 일이 끝날텐데...' 하는 악동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죠.


  일이 시작되었고, 가파른 산길을 따라 모래주머니가 하나 둘 날라지기 시작합니다. 젊은이 3명은 의기 충천하여 부지런히, 아주 부지런히 오르내리기를 반복합니다. 빨리 끝내고 집에 가야 하니까 쉴 새도 없습니다. 오전 11시경, 어라?! 벌써 약속된 양이 완수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작업자들의 체력이 좋습니다. 이대로라면 점심 먹기 전에 오늘 일이 끝날 판입니다. 그래도 제 입장에서는 어려운 일을 완수했고 작업량도 확보했으니 손해 보는 일은 아닙니다. 그만큼 열심히 일해 주었으니 서로가 윈윈(win-win)한 샘이지요.


  남아있는 모래가 조금 더 있어서 이 역시 산에 올려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다른 사람을 고용해서 이 일을 시키는 것보다 이 분들이 일도 잘하고 열심히 하니, 하던 김에 하면 깨끗하게 현장이 정리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모래도 오늘 다 올려놓으면 2품(2일 치 품삯)을 주겠다고 작업자들에게 한번 더 제안을 했습니다. 여기서 의견이 갈렸습니다. 2명은 하겠다고 하고, 나머지 1명은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결국 2명이 1명을 설득해서 나머지 '야리끼리' 가 성사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역시 다수결에 의한 민주주의 국가가 맞는 것 같습니다.


  점심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일이 시작되었고, 빠르게 또 모래주머니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젊어서 그런지 정말 체력이 장난 아닙니다. 예상대로 4시가 조금 넘어서 두 번째 과업도 완벽하게 성공을 합니다. 대단합니다. 이틀치 품삯도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게 일이 마무리되었습니다.


  며칠뒤,


  그 일 잘하던 3명의 작업자는 몸이 아파서 일주일간 일을 못했다는 뒷소식을 들었습니다. '야리끼리'의 폐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 욕심으로 작업자의 건강을 신경 써 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상대방의 욕심을 역이용해서 내 이익을 취했다는 미안함과 반성이 들었습니다. 벌써 10년도 더 된 에피소드이지만 그 일을 계기로 보다 안전한 작업환경을 만들고 근로자의 입장에서 한번 더 생각하는 근로환경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역시 소수자의 의견도 무시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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