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떠가는 듯 그대 모습~' 가수 이문세 씨의 노래가 빛을 발하는 계절이 되었습니다. '광화문연가'도 그렇고 감성 가득, 주옥같은 가사가 가을을 더욱 풍성하게 합니다. 올여름은 열대야가 심해서 제주도에서 '노란귤'이 아니라 '초록귤'이 생산된다고 합니다. 같은 이유로 서울도 지금쯤이면 황금색 은행잎이 거리를 빛나게 할 텐데 여전히 초록빛을 띠고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말하지만 올해 단풍은 그리 예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ㅠㅠ
서울 강북에 있는 석관동은 외삼촌이 살던 곳입니다. 조금 외진 곳이긴 해도 저층 아파트라서 동간 간격도 널찍하고, 담장 주위로 은행나무가 심겨 있어서 가을이면 거실 창문으로 은행나무가 금빛 향연을 벌입니다. 족히 십수 년은 된 나무라 키도 크고 잎도 많아서 가히 '향연(饗宴)'이라는 표현이 과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도시에 도로가 개설되면 인도와 도로가 분리되고 인도 쪽으로 가로수가 심깁니다. 도로 폭이 넓은 곳은 중앙에 분리대가 설치되면서 역시 나무가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가로수로 많이 사용되는 나무는 느티나무, 메타세쿼이아, 배롱나무, 이팝나무, 벚나무, 소나무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은행나무는 공해에 강하고, 병충에 대한 저항력이 강하다는 이유로 가로수로 많이 애용되는 나무이기도 하죠.
가로수 이식(移植) 공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굴취 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 다시 식재를 하게 됩니다. 은행나무 이식공사를 위해 굴취장소를 가보았더니, 세상에나! 외삼촌 아파트에 있는 그 은행나무들입니다. 아파트 재건축을 위해 단지 내 수목을 정리하나 봅니다. 한 그루씩 나무가 굴취되고 화물트럭에 적재되어 새로운 곳으로 이동됩니다. 도착한 곳은 도로 중앙분리대입니다. 도착한 나무들이 한 그루씩 일정한 간격으로 들어서고, 오밀조밀 갑갑하게 지내던 은행나무들이 듬성듬성 시원하게 심겨졌습니다. 삼국지 제갈량과 방통처럼 복룡봉추(伏龍鳳雛)로 지내다 때가 되어 세상에 나온 듯, 은행나무 군(群)으로 숨어 살다 이제는 당당한 한그루 수목으로서 위용과 수려함을 뽐내고 있습니다.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법한 그 나무가 어느 날 신분이 변했습니다. 민간에서 공공영역으로 자리를 바꿨으니 말입니다.
담양 죽녹원 앞에 영산강 문화공원이 있습니다. 강을 따라 가로수가 길게 늘어져 있습니다. 낮에는 자전거길로 유명한가 봅니다. 아내와 늦은 밤에 그 길을 걸었습니다. 나무에 작은 안개등이 가득하고 잔잔한 음악이 흐릅니다. 참 묘한 기분이 듭니다. 영화 '중경삼림(重慶森林)'의 ost 몽중인(夢中人)처럼 꿈속에서 만난 사랑의 연인처럼 함께 걷습니다. 마치 이 생을 다하고 조용히 어딘가를 걸어가는 평온함과 몽환적인 느낌이 듭니다. 야경 보러 가자는 우리 부부의 간곡한 부탁에도 아이들에게 거절당하고 나온 두 부부의 안쓰러움이 한몫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에 의하지 않고는 조금도 자리를 떠날 수 없는 것이 꽃과 풀과 나무들입니다. 생명은 있으되 갇힌 공간 안에서만 자유합니다. 숨을 들이키고 내쉬며, 양분을 빨아드리고 열매를 맺고, 광합성도 하면서 나름 부지런히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제 뽑힐지 모르는 우리네 삶과 같이......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로마서 8:19-22).'
늘 함께 계실 것 같았던 부모님도, 외삼촌도, 이모도, 고모도, 삼촌도 이제는 이 세상에 안 계십니다. 낡은 아파트를 바라보며 아무 일 없이 그 자리를 지켜왔던 은행나무가 어느 날 가로수가 되듯이, 당신들도 누군가에 의해 홀연히 옮겨지셨습니다.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된 것이죠. 어느 날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린도전서 15장 51-52절)'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이
엄습해 올 때도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에
저는 오늘을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