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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Sep 23. 2019

'믿고 보는 글'은 어디에도 없다

상호의존적 관계 속 자기 언어를 갖기 

한 사람의 인격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을 리 없다. 만약 누군가의 인격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면, 그 기준은 말하는 자의 관념 속에 들어 있다. 기준을 말하는 자의 관념 안에는 그동안 그가 행해온 경험과 공부, 그리고 소양이 들어 있다. 결국 그 기준은 그 사람의 소양에 기초한 주관적 잣대일 뿐이다. 물론, 사람의 역할이나 능력에 대하여 판단을 내려야만 할 때도 있다. 이런 경우 구체적 사실이나 경험, 행위 등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좋다. 인격은 자신의 경험과 행위에 깃들어 있다. 겉보기에는 엄청나게 고고한데, 하는 행위는 상식적 기준에서 멀다면, 이는 허위적 고고함이다.


가끔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에 대한 '평판'을 듣는다. 좋은 것도 있고, 때로 듣기에 거북한 것도 있다. 그런데 내가 했던 어떤 행위가 아니라 나의 인격 자체에 대한 평판을 전해 들을 때 당혹스럽다. 내가 하는 어떤 행위에 대하여 지적이 들어오면, 그리고 지적이 충분히 합리적이면 행위를 고칠 수 있다. 하지만 본시 사람의 '인격(인간성)'이라는 것은 그렇게 쉬이 바뀌지 않는다. 인격은 그 사람이 개별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유한 본성이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은 어떨까? 이것 역시 내 주관 속에 들어 있는 판단을 기초로 한다. 여기서는 좋은 사람이 저기서는 나쁜 사람이 되고, 누구에게는 좋은 사람이 또 다른 누구에게는 나쁜 사람일 수 있다. 다만, 그 사람이 있고, 그가 했던 행위가 있을 뿐이다. 어린아이가 들었던 세상의 이야기는 항상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대립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 안에 깃든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은 성인이 돼서도 사람을 구분하고 분리하는 잣대로 쓰인다.


'좋은 사람 : 나쁜 사람' 구도가 아니라 '좋은 사람 : 싫은 사람'의 구도는 어떨까. 후자의 구도에서 좋은 사람은 '선한 사람'이라기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런 접근은 개인의 신념 또는 취향을 반영한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개인의 취향은 인정해야 한다. 문제는 부지불식간에 체화된 사회적 인식이 끊임없이 선과 악을 가르고 단죄하며 분리하고 배제하는 것에 있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존중받아야 할 개인의 취향까지도 선악 개념으로 판단하여 사냥을 시작해야 직성이 풀리는 문화가 넘친다. 사회적으로 합의한 공동의 가치에 대하여는 서로 책무감을 가질 수 있고, 일탈에 대하여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할 수 있지만 타인의 취향에 대하여는 내 선호와 무관하게 존중해야 한다. 최소한 그것을 이유로 분리, 배제,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나에게도 '싫은 사람'이 있다.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듣는 편이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개방적인 편이지만, 피곤한 대화가 있고, 서둘러 종결하고 싶은 만남이 있다. 내가 어떨 때 그런 피로를 느끼나 하고 생각해 보니, '지나친 자기 확신'으로 관계를 이어가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나쁜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나와는 대화의 방식이 다른 것뿐이다. 이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땐 에너지를 많이 소비한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모든 세상의 법칙을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모든 지식은 잠재적이다. 언제든 다른 견해와 의견이 있을 수도 있고, 그것이 구성원의 선택을 받는다면 한시적으로 공인된 보증을 받을 뿐이다. 


지난 글에서 확증편향과 선택인지에 대한 생각도 밝혔지만, 자기 확신에 빠져 세상 모든 상황을 자기 기준으로만 보고, 해석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이럴 땐 토론도 힘들고 상호작용도 힘들다. 최대한 서둘러 대화를 끝내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혹시 남도 나를 그렇게 여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고 '대화의 개방성'을 다듬는다.


온라인 사회관계망에도 타자에 대한 비난이 넘친다. 행위에 대한 판단을 넘어 인간성을 도마에 올려 비난하면 곧 동조하는 댓글이 달린다. 이 과정에서 사실도 분노도 증폭한다. 타인의 판단에 기초하여 한 사람의 인격을 평가할 땐 이렇듯 위험이 따른다. 
그 사람이 얼마나 '싫은지를 말하는 것'은 내 취향까지 드러내는 행위다. 선호를 밝히는 과정을 통해 내 취향을 '공표'하는 것이다. 따라서 타인을 비난하는 행렬에 끼어들 땐 최소한의 '자기 판단'이 필요하다. 즉 기준은 '내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가'이다. 

나만의 고유한 언어로 설명할 수 없을 때, 타인의 판단에 의존하는 경향이 생긴다. 그러나 일방적 의존은 '자
언어'를 사라지게 만든다. 지식 구성 과정에서 작동하는 사람들 간의 상호의존성은 서로 독립적이며 대등할 것을 전제로 한다. 단적으로 '자기 언어'가 없는 삶은 불행하다. 특정 시점의 자기 언어는 그 사람의 경험과 소양을 반영한다.

'믿고 보는 글'이란 말은 늘 위험성을 내포한다.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기대하는 것은 '자신의 글을 독자들이 온전히 믿어주는 것'이 아니다. 대중의 믿음을 제대로 의식하는 사람은 자신의 글이 끊임없는 '의심의 대상'이 되길 기대한다. 누군가를 존경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을 의심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더 새롭고 더 진전된 대안을 찾는 상호의존적 노력이다. 



* 커버 이미지 출처 http://theconversation.com/academics-fear-the-value-of-knowledge-for-its-own-sake-is-diminishing-75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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