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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May 28. 2023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

무지의 인정, 내 안목만큼만 보이는 그림 

교육학을 전공하였으나 이 분야에 대하여 말을 보태기가 점점 더 어렵다. 60살을 넘겼으니 세상사 돌아가는 이치를 이해할 법도 하건만 그것을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다. 자기를 낮추고 더 뛰어난 존재가 있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을 겸손이라고 한다면, 겸손이란 적어도 뭔가를 아는 사람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려는 자세이다. 애초에 뭘 몰라서 아는 척을 못하는 것은 그냥 무지에 가깝다. 무지의 시간이 무용하고 무심하게 흐르는 느낌이다. 다만,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음을 스스로 알고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아직 쓰레기 같은 인생은 아니구나 하는 작은 안도감이 있다. 

피곤이 잔뜩 쌓였던 주말에 얼리버드로 예매해 놓았던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 전시회에 다녀왔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호퍼와, 전시회를 통해 한 걸음 더 다가선 대상으로서 호퍼, 그리고 내가 알 수 없는 본질적 실체로서의 호퍼가 제각각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이른바 도시인의 고독이나 단절을 표현한 호퍼의 일부 작품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치기 어린 일인가. 그것은 마치도 '별이 빛나는 밤에'를 보고 고흐의 작품 세계를 전부 수용한 것처럼 느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서울시림미술관에 걸려 있는 걸개그림, 건물의 질감과 어울린다.


우리에게 호퍼를 가장 많이 알린 그림은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owks, 1942)'일 거다. 그것을 보고 느낀 도시의 밤거리와 인간의 외로움으로 호퍼의 작품세계 전반을 말하기는 쉽지 않다. 이번 전시회 관람을 통해 내가 알게 된 점이다. 무지에의 자각은 그림 한 장을 보는 데도 단순한 느낌을 넘어 부단한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어졌다. 


다만, 호퍼의 그림이 한국 사람들의 정서에 쉽게 다가오는 이유로 단기간에 이뤄진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 속에서 느끼는 인간 소외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나는 호퍼의 그림을 보면서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근대' 개념을 종종 떠올리곤 한다. 현대인이 인식할 수 없는 불확실성, 그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불안과 공포의 실체를 생각한다. 정지된 듯 안정된 구도 속의 호퍼의 그림은 불안하게 유동하는 현대인의 삶과 많이 닮아 있다. 그것을 바우만은 글로, 호퍼는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차이라는 생각이 든다.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owks, 1942, Art Institute of Chicago)


교육과정을 공부한 사람들이 흔히 인용하는 제롬 브루너의 이론은 사실 청년 브루너 시절인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다. 우리에게는 '지식의 구조'와 '합리적 핵심'으로 알려져 있다. 말년의 브루너가 그 자신이 했던 주장의 재음미를 통해 교육과정에서 서사성(narrative)을 도입했다는 이야기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전기와 후기의 이론이 다른데 각각이 가진 완결성으로 인해 전기 이론으로 더 많이 대표되고 있다는 역설이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에게 알려진 호퍼는 주로 1940년대 이후라 할 수 있는 '후기 호퍼' 시절의 그림이다. 그에게는 주로 밥벌이용 삽화를 그렸던 초기의 파리시절이 있고 뉴욕에 정착하여 적응하던 시절이 있다. 처음 안 사실인데 에칭 프레스를 이용하여 판화를 찍었던 시절도 있었다. 판화는 후기 호퍼 그림과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이 장황한 이야기의 결말은 우리 같은 장삼이사 범인들은 부분을 통해 전체를 볼 수밖에 없는 숙명이라는 것이다. 가능하면 전체를 파악하기 위해 종횡으로 엮고 풀고 해 봐도 본질에 다가서기에는 역부족이다. 그저 자신의 선입견 속에서 나름의 해석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무지함을 인정하고 관객으로서 충실하게 감상하면 될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충실한 감상자'의 역할은 오로지 앞에 있는 작품과의 교감이다. 심지어 제목까지도 생략하고 볼 수 있는 시선과 그에 따른 자기만의 특별한 느낌을 갖는 것이다. 누가 뭐하고 할 사람이 없다. 사람마다, 작품마다 제각각 다른 미학을 창조한다는 것, 감상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심미를 추구하는 예술 행위를 포괄한다고 믿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학적 감식안을 갖기 위한 학습은 필요하다. 더 넓게 더 깊게 보기 위해서다.


호퍼는 내성적이며 완고했다. 한편 그의 아내 조세핀 호퍼는 사교적이고 활동적이었다. 또한 조세핀 역시 그림을 그렸다. 호퍼가 자신의 그림이 아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정도였다. 세 군데서 이뤄진 전시회 관람을 모두 마치면 마지막으로 영상 자료실에서 호퍼의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를 본다. 호퍼의 얼굴, 육성 모두 오로지 그림 자체에 몰입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조세핀도 화가로서 명성에 대한 갈증이 왜 없었겠냐만, 남편을 위해 헌신적으로 조력한다. 꼼꼼하게 일지를 기록하고, 남편과 함께 다녀온 연극의 티킷을 평생 모았다.

더 많은 재능이 있는 쪽을 밀어주고 헌신하는 연인 혹은 부부의 이야기는 흔한 서사이다. 비운의 뮤즈였던 카미유 클로델이 그러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단순하지 않다. 자기 중심성의 극단에 있는 예술가들, 옆에서 순정과 열정으로 삶을 소모하는 반려의 이야기가 그것이지 않나. 호퍼의 그림에 나타나는 모델은 오직 한 명 그의 아내 조세핀 호퍼였다. 호퍼의 자기중심적이며 완고한 성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림 속 조세핀은 호퍼에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봐, 당신은 정말 고독이 뭔지, 외로움이 뭔지 알아?"라고 말이다.  


아침 태양(Morning Sun, 1952)


이에 대한 호퍼의 답은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림을 그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그림으로 알려져 있는 '두 코미디언(1965)'의 표정과 자세는 아내에게 보내는 헌사일지도. 호퍼는 오직 그림을 통해서 조세핀과, 그리고 세상과 대화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만약 이 이야기를 비트겐 슈타인이 들었다면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하므로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을 지키라"라고 일갈했을지 모를 일이다.

이번 전시에서 아쉬웠던 것은 호퍼의 대표작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 영상 다큐를 통해 대형화면으로 볼 수 있다. 이 글의 커버 이미지로 쓴 작은 스케치만 볼 수 있다. 여기에 없는 것은 휘트니 미술관에 없는 것일지도. 아마도 시카고 미술관에 있는 듯. 
검색해보니 이 그림은 지금 시카고 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에 있다.


Two Comidians(1965) 이 작품을 그리고 2년 후 호퍼 사망, 그로부터 1년 후 조세핀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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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버 이미지는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1942)'의 스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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