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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냄새 나는 브랜드

by 송정훈


며칠 전 들렀던 마포역 인근 라멘집의 입구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일본 시즈오카현 후지 에다시에서 온 나카야스 주방장입니다. 일본에서 조리사 자격증을 취득한 지는 약 20년 가까이 되었고 일본 음식점에서 꾸준히 요리를 해왔습니다. 이번에 취업 비자를 어렵게 획득했고, 제가 너무너무 사랑하는 한국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아직 한국어를 잘 못하지만, 저를 니카야스 아저씨라고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보통의 라멘집이라면 가게 앞에 정통이나 현지의 맛 같은 수식어가 붙어 있었겠지만, 이곳은 하얀 A4 용지에 편지처럼 빼곡하게 쓰인 글씨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나는 투박하면서도 인간적인 글귀가 마음에 들어 안에 들어가 라멘 한 그릇을 먹었다. 그곳에서 먹은 라멘이 인생 라멘이고 영화처럼 따뜻한 경험을 했다면 아주 좋은 결말이었겠지만, 솔직히 맛은 특별하지 않았고 고객 응대도 평범했다. 그래도 한쪽 벽면과 젓가락 통에 자신과 자신이 살던 지역을 소개하고 자신이 만드는 라멘의 스타일을 꾸밈없이 적어 놓은 편지글 형식의 안내문은 인상적이었다.


그날 들렀던 커다란 상가 건물의 지하에는 잘게 쪼개진 조그만 가게들이 시장 가판처럼 빼곡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많은 가게들 사이에서 라멘집 입구에 붙어 있던 글에는 힘이 있었다. 요리사는 투박한 글을 통해 자신을 먼저 드러내고 있었고, 그 안에는 사람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이 집에서 라멘을 먹는 것은 그저 이름 모를 누군가와 이름 모를 누군가가 만나 약속된 것을 주고받고 끝나는 상업적 관계 이상의 교류가 담겨 있는 느낌이었다. 조미료처럼 살짝 더해진 사람의 냄새가 나는 좋았고, 자연스레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라멘집 벽면과 젓가락 통에 붙어 있던 문구들


몇 해 전 이솝의 핸드크림이 선물로 좋다는 추천을 받아 백화점 매장을 찾은 적이 있다. 스킨, 로션이 가진 화장품의 대부분인 사람으로서 화장품 매장은 어렵고 어색한 공간인지라 쭈뼛거리며 서성이자 점원이 먼저 말을 걸었다.


“차 한 잔 드실래요?”


그녀는 매장 한쪽에 준비되어 있던 차를 종이컵에 부어 건넸고, 나는 따뜻한 차를 홀짝이며 매장을 둘러보고 핸드크림을 보러 왔다는 뻔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는 손을 씻고 두 가지 종류의 핸드크림을 각각 발라 향을 맡아 본 다음, 더 낫다고 생각한 제품을 하나 사서 나왔다. 후에 이솝 모든 매장에는 이솝만의 시그니처 티를 준비해둔다는 것과 그것이 그들만의 독특한 접객 방식임을 알긴 했지만, 차를 건네받은 경험은 따뜻한 기억으로 남았다. 찾는 게 있냐고 묻는 보통의 대화와 다른 응대법은 브랜드의 호감으로 이어졌고, 이후 내가 쓸 것과 선물할 것을 사기 위해 몇 차례 더 매장을 찾게 했다.


빵집에 가면 충만함 같은 것이 느껴진다. 구운 지 얼마 되지 않은 노릇노릇하고 빵빵한 빵들이 푸짐하게 쌓여있는 모양새와 그것들이 뿜어내는 향긋한 냄새가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기분 좋음의 감정이다. 거의 모든 빵집에서 좋은 느낌을 받지만, 성심당 본점에서는 그 감정을 조금 더 진하게 경험하게 된다. 그 이유는 대전이 고향인 사람으로서 고향을 찾아 느끼는 편안함의 영향이 가장 크겠지만, 소리의 덕도 있는 것 같다. 오전 시간 성심당에서 빵을 고르고 있으면 무슨 무슨 빵이 나왔다는 방송 소리가 틈틈이 울린다.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괜히 학창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도 좀 나고, 한편으로는 갓 구워낸 빵을 내보내고는 잠시 숨을 돌리고 있을 제빵사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기도 한다. 진열된 빵을 트레이에 담아 계산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방송은 묘한 유대감과 따뜻함을 더하고 있었고, 성심당에서의 경험을 더 기분 좋게 만들었다.



브랜드의 SNS 계정도 사람 냄새가 물씬 나게끔 운영하는 경우가 있다. 오래된 사례지만 한국 민속촌의 페이스북 계정이 그렇다. 그들은 조선 시대에 살았을 법한 아씨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계정의 운영자로 설정해 예스러운 말투로 민속촌의 이야기를 전하는데, 그 말투와 프로필 사진에서 과거로부터 초대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이 살짝 묻어난다. 크린토피아 트위터 계정에는 잘생긴 연예인을 좋아하는 덕후의 유쾌함이 잔뜩 배어 있다. 그녀는 차은우의 잘생긴 얼굴로 옷걸이를 만든 다음, ‘이거 만든 사람이 나야 나’라며 유쾌한 자랑을 늘어놓고, 각종 행사 내용이 빼곡히 적힌 포스터 시안과 차은우의 잘생긴 외모가 중심이 되고 크린토피아 로고는 한쪽 구석에 작게 표시한 포스터를 함께 올리면서 앞에는 회사가 원한 거, 뒤에는 내가 원한 거라는 귀여운 멘션을 적어 놓는다. 계정에는 덕업일치를 이룬 어떤 이의 행복감이 그대로 묻어난다.


다방의 SNS 담당자도 일기 형태의 콘텐츠를 꾸준히 올린다. 사실 지인들의 게시물 중간중간 끼어있는 광고를 통해 그들의 콘텐츠를 몇 차례 보긴 했지만, 인상적이지는 않아 ‘좋아요’를 누른다거나 팔로우를 하진 않았다. 그러다 얼마 전 담당자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며 자신의 개인적인 연애 썰을 풀기 시작했고 이전 자취 생활의 꿀팁 같은 걸 올렸는데, 너무나도 사적인 콘텐츠를 접하며 이름 모를 누군가와 옅게나마 유대감이 쌓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친구가 다니는 회사가 친근하게 느껴지듯 다방이란 브랜드가 조금 가깝게 느껴지는 경험으로 확대되었다.

크린토피아 트위터에는 유쾌한 덕후의 기운이 느껴진다


책 <어떤 브랜드가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가>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원시 시대의 인간은 생존을 위해 '따뜻함'과 '유능함'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재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판단해야만 했기 때문에 주변인의 따뜻함과 유능함을 판단하는 능력은 수천 년에 걸쳐 발전하고 진화했다고. 그러면서 이 두 가지 키워드는 브랜드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며 브랜드도 유능함과 따뜻함을 갖춰야 책 제목처럼 사람의 마음에 파고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좋아하는 브랜드 몇 개를 떠올린 다음 호감의 이유를 곰곰이 따져보면 책의 주장이 엉뚱한 소리가 아니란 걸 깨닫게 된다. 입고 나면 괜히 더 맵시가 사는 것 같은 제품, 왠지 모르게 편한 공간, 나랑 성향이 비슷해 정이 가는 브랜드. 어떤 건 유능함의 이름으로, 또 어떤 것은 친근함의 옷을 입고 내가 다가왔다.


앞에 나열한 브랜드 경험들은 사람 냄새를 머금은 따뜻함 때문에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은 사례들이다. 누군가는 편지 같은 글로 자신을 먼저 드러냈고, 또 누군가는 개인적 취향을 잔뜩 묻히면서 브랜드의 표정을 풍부하게 만들었고, 또 어떤 브랜드는 차를 대접하며 단순한 접객 이상의 교류를 지향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은 약간의 온기를 더하며 기분 좋은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흔히 오늘의 결핍이 내일의 트렌드가 된다고 한다. 사람과 사람의 접촉이 줄어들고, 기계를 통해 음식을 주문하고 터치로 물건을 사는 시대에 부족한 건 관계일 것이다. 그런 결핍 속에서 갈수록 품질 격차는 작아지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따뜻함이라는 키워드가 가진 힘과 영향력은 점점 더 중요해질 것 같다. 그래서 브랜드에 사람 냄새를 더하며 교류하고 좋은 관계를 맺는 일은 매력적인 브랜드를 만드는 또 하나의 좋은 방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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