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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위나 Sep 19. 2020

나를 힐링시켜주는 목소리

목소리 예찬론자의 힐링캠프






 분주한 주방이 들끓고 있다.

 오래간만에 배추를 사 왔고, 배춧국을 끓이는 중이고, 익은 김치를 좋아하지 않는 아이를 위해 겉절이를 담그는 중이다.

 주방 한에 라디오를 켠다. 레인지 후드 소리, 싱크대 물소리, 주도구 소리 가득한 공간 한켠에 어우러지는 라디오 소리는  오케스트라의 하모니를 이룬다.  

 차분한 디제이의 음성, 낯익은 가수의 노랫소리가 주방에서의 노동을 즐거운 일상으로 만들어준다. 라디오 소리가 없다면 주방은 외로운 무대 뒤와도 같으 삭막한 사막과도 같아 노동의 힘겨움에 지쳐 쓰러졌을 것이다.


 mp3에 이어 음악 스트리밍 시대이다. 듣고 싶은 노래는 언제 어디서든 들을 수 있는 지금, 나는 듣고 싶은 노래를 꼭 들어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누군가의 음성을 들어야 했다.

 누군가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니..

 이 무슨 해괴한 말인가..







 며칠 전 반가운 목소리를 라디오에서 들었다.

 성우 정형석, 광고계의 블루 목소리, '나는 자연인이다' 내레이션의 주인공...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다.

  년 전 주 2~3회 야간 운전을 해야 하는 날들이 있었다. 하루 업무를 마치고 가족들을 챙기고 난 뒤 밤에 운전을 한다는 게 지금의 체력으로서는 감당이 안될 정도로 힘든 일과였다. 하지만, 어떻게 지나왔을까.. 어둑한 밤길, 운전에 집중하는 그 시간, 나 홀로 존재하고 있 그 안에서 힐링의 시간이 있었다. 나지막이 울리는 의 음성 현실이 아닌 아득한 향수와 평온한 휴식 가져다주었던...

 아이 셋 워킹맘으로서 수험생 학부모 역할까지 해야 했던 나는 당시, 암 치료를 위해 고향을 등지고 오직 장녀를 바라보고 새 삶의 터전을 꾸리신 친정부모님에 대한 걱정과 책임감으로 하루하루 무거운 어깨였다.

 그 시기, 정형석 님의 목소리 메마른 나의 감성을 녹여주고 경직된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삶의 무게로 지쳐있는 나를 위로해주고 쉴 수 있게 해 준 건 심장 박동과 같은 파동으로 파고드는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내가 광고 속 성우의 음성이나 다큐프로의 내레이션, 라디오 디제이의 음성 집중하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라디오를 듣다가 디제이와 패널들의 만담이 길어지면 채널을 수시로 바꿨다.

 "난 음악이 듣고 싶단 말이야, 너희들의 잡담이 아니라.."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심지어 한동안은 디제이의 언변을 들을 기회가 적은 클래식 채널을 고수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청취자 사연을 읽어주는 디제이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 시작은 출근하는 차 안에서 듣던 최수종 님의 프로였는데 친근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청취자들의 사연들은 들을 때마다 감정이입이 되 나도 모르게 울컥하기도 하고 까르르 웃기도 하고 맞아 맞아 맞장구치기도 하고 안쓰러워하면서 우리네 주변의 이야기를 내 일인 것처럼 느끼고 생각하고 공감하고 위안받는 것이었다.

이후 스토리에 집중하던 시기를 지나 디제이와 성우의 음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서서히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 귀속을 통해 들어오는 어느 일정 주파수의 목소리들이 내 심장과 머리를 안정시키고 있다는 것을..



 아기는 뱃속에서부터 가족의 음성을 듣는다.

 태아가 들었을 엄마의 목소리는 자궁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객지에서 통화하는 그리운 가족의 목소리는 위로받고 편안히 쉴 수 있는 고향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오디오북에서, 그 옛날 라디오 극장에서 성우들의 실감 나는 목소리 연기에 귀를 기울였던 것도 모두 저마다의 힐링 목소리를 갈구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과거 어느 프로에서  故김광석에 대해 작곡가 유희열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가 대중들에게 그토록 사랑받는 이유는 노래 자체도 좋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의 음색 때문이라고..

 근래 신드롬이 되어버린 트로트의 원인도 그들의 구슬프고 진심 어린 발성이 많은 애청자들로 하여금 추억과 향수에 젖어 들어 현실에 겪는 어려움과 상처에 위안을 받기 때문 아닐까. (물론 작사, 작곡이 큰 역할을 한다는 건 간과하지 않겠다.)






 방탄소년단의 슈가의 솔로곡을 듣는다.

 이 나이에 랩을 듣는다는 게 어색하고 쑥스러울 줄 알았는데, 의 음성은 듣는 사람의 나이와는 상관이 없이 큰 위로가 된다.(가사와 멜로디도 물론 좋다.) 공기를 타고 귀로 흘러들어오는 중저음은 심장의 박동을 타고 피와 함께 온몸을 돌아 나의 세포를 재생시켜준다.

 나는 다시 살아난다.

 오늘도...

 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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