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번째 이야기
이렇게 대안학교에서의 일 년이 끝났습니다. 그러나 한 해의 끝은 새로운 해의 시작과도 맞닿아 있는 법입니다.
12월이 가고 1월이 오면, 눈이 하얗게 쌓인 고요한 학교가 다시 시끌벅적한 소리로 채워집니다. 흙길에 캐리어를 끌던 드드득 소리 대신 도톰하게 덮인 눈 위로 캐리어 바퀴 자국과 발자국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다면, 겨울계절학교가 막 시작하려 한다는 뜻입니다. 선생님들과 봉사자 학생들, 계절학교에 참여하는 초등학생들이 차례로 모일 때쯤이면 냉기가 감돌던 학교의 바닥도 어느새 따뜻해져 있을 것입니다. 모두들 아늑한 실내에서 색종이를 오려 붙이고, 흙으로 그릇을 빚기도 하고, 한밤중에 차가운 바깥으로 나가 운동장에 모여 풍등을 띄워 보기도 할 테죠. 지난 여름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봉사자들은 베란다를 몰래 질주하는 아이들을 말리고, 사방에 떨어진 도자기용 흙을 줍고, 화장실 청소를 한답시고 바닥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아이들을 내보낸 후 뒤처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입니다. 나흘 간의 겨울계절학교가 끝나면 학교는 다시 하얀 이불을 덮고 잠에 빠져들겠죠.
긴긴 겨울이 마지막을 향해 달려갈 즈음, 3학년들은 졸업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어디에 갈지, 무엇을 볼지, 어떤 것을 할지 등 하나부터 열까지의 모든 과정을 3학년들이 오롯이 스스로 정해 떠나는 여행입니다. 졸업여행은 여느 때처럼 밝은 친구들의 활기와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주는 특유의 가라앉은 느낌이 공존하는, 여러 감정이 이리저리 뒤섞인 묘한 여행이 되곤 합니다. 스스로 기획한 졸업여행 일정을 마무리하고 난 뒤, 3학년들은 모두 함께 학교로 향하게 됩니다. 학교 교문을 들어서면 익숙한 얼굴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졸업식을 위해 전교생이 다시 학교에 모였습니다.
모두가 학교의 자기 자리로 돌아오면 그 해를 함께했던 세 학년끼리 맞는 마지막 일주일이 시작됩니다. 학교에 있을 때는 수도 없이 반복되던 일주일이지만, 이때만큼은 바로 그 '월화수목금토일'이 하나씩 지나가는 것이 선명히 느껴지며 '시간이 흐른다'라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도 생생히 와닿을 것입니다. 남은 일주일 동안 무엇을 해야 한다고 정해진 바는 없으므로, 원하는 방식대로 하루하루를 보내면 됩니다.
졸업식 전날에는 전야제가 열리곤 합니다. 후배들은 3학년이 졸업여행을 가 있는 동안 미리 모여 선배들에게 전야제 당일 어떤 이벤트를 해 줄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곤 하죠. 전야제 당일이 되면 후배들이 3학년들을 가운데에 앉혀 놓고, 무대에 올라 몰래 준비한 작은 공연을 선보입니다. 때때로 후배들이 함께 준비한 선물을 건네 오기도 합니다. 이후에는 3학년들끼리 모여 졸업 기념으로 만든 영상을 보고, 온갖 이야기를 나누며 지난 삼 년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집니다. 전야제를 앞두고 학교를 돌아다니다 보면 간혹 후배들이 노래를 연습하는 소리가 어디선가 새어나올 때도 있지만, 최선을 다해 모른 척 해 주는 게 도리겠죠?
전야제가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 누우면, 지난 삼 년간 지겹도록 보아 왔던 천장의 모습이 어쩐지 낯설게만 여겨집니다. 평소처럼 순식간에 깊은 잠에 빠져드는 친구들도 있고, 밤늦도록 쉽사리 눈을 감지 못하는 친구들도 있겠죠. 기숙사에서 마지막 날 밤을 보내고 나면, 1학년 때는 차마 오리라 생각하지도 못했을 만큼 아득하게 느껴졌던 '졸업식'의 아침이 밝습니다. 입학식 날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학교에 모여 넓은 강당을 가득 메우게 됩니다. 각종 내빈들의 졸업 축하 연설이 이어지고, 학생 한 명 한 명이 단상에 올라 졸업장과 꽃을 받게 됩니다. 3학년 학생 대표가 연단에 서서 한 글자 한 글자 손수 적어내려간 졸업사를 낭독하면 학생들이 앉은 자리에서 훌쩍이며 코를 푸는 소리가 작게 들려오곤 합니다. 이후 잦아드나 싶었던 훌쩍이는 소리는 2학년 대표가 그 뒤를 이어 연단에 올라 송사를 읽어내려갈 때 다시금 커지게 됩니다. 눈이 부은 후배들과 인사를 나누고, 친구들에게 연신 손을 흔들며 짐을 챙겨 학교를 나서면, 비로소 삼 년간의 학교생활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 옵니다.
졸업식이 끝나면 다시 학교는 조용한 잠을 잘 것입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봄바람 한 줄기를 느낄락 말락 하는 순간이 되면, 예비 신입생들이 학교로부터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라는 문자 소리가 학교를 잠에서 깨우겠죠. 작년의 우리가 그랬듯 말입니다.
2월의 어느 날이 되면 다시 제 몸만한 캐리어를 끌고 어색하게 학교로 쭈뼛쭈뼛 들어서는 신입생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지난 해에 우리가 불렀던 노래에서 노랫말만 새롭게 바뀐 합창 소리가 바람에 실려 오겠군요. 신입생들이 새로운 곳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준비하는 동안, 학교도 움틀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3월이 되면 학교는 이삿짐센터처럼 변하겠죠. 작년 겨울에 학생들이 서로의 방을 돌아다니며 그렸던 택배 박스 위의 그림이 이름표 역할을 할 것이고, 멋쩍게 인사를 나누는 신입생들과 마치 어제 보고 다시 보는 듯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는 2, 3학년 학생들의 모습이 곳곳에서 보일 것입니다. 처음 후배를 맞는 2학년들은 어떤 아이들이 들어올지 궁금해하며 입학식 합창 시간에 목을 길게 빼고 신입생들을 구경하는 데 여념이 없겠죠.
그렇게 이곳에서의 일 년이 더해집니다. 매년 작년과 비슷한 듯 많은 것이 바뀔 것이고, 그 조그만 '바뀜'들이 모이고 모이다 보면 이후의 학교는 이전과는 또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곳을 거쳐 간 학생들이 끊임없이 세상으로 나가고, 또 세상으로부터 새로운 학생들이 끊임없이 들어오며 학교는 계속해서 숨을 쉴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대안학교의 일 년입니다. 누군가는 이곳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반대로 또 다른 누군가는 이곳의 교육방침이 자신에게 잘 맞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처음 이곳에 신입생으로 들어올 때의 우리와 졸업생 신분으로 학교를 나설 때의 우리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시간은 분명히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하릴없이 시간을 보낸다 해도, 그 시간 동안 사람은 어떤 방향으로든 조금씩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육은 그 '시간'에 농도를 더하는 과정입니다. 의미 없게 느껴지는 무채색의 시간도 물방울이 바위에 흠을 내듯 조금씩 사람을 빚어 낼 수 있을진대, 하물며 교육을 통해 농도가 짙어진 시간은 얼마나 사람을 많이 변화시킬까요. 학교는 계속해서 새롭게 들어오는 학생들을 변화시키고, 그 학생들이 다시 학교의 분위기를 변화시키고 떠나며, 변화한 학교의 모습을 보고 새로운 학생들이 또 다시 학교를 찾게 되곤 할 것입니다. 대안학교라는 공동체는 그렇게 숨을 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