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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멈춰서 쉬어간대도

한국에서 보내는 휴식

by K 엔젤

연말은 과자 부스러기와 함께

연말이 다가오자 이 집은 갑자기 출입국 사무소가 됐다.
나는 12월 26일에 인도로 가고, 덤으로 한국에서 4주를 보낼 예정이다.
타이 친구 셀리는 3주 동안 고국에서 엄마 밥을 먹고 올 거고, 일본인 하루카는 LA로 도망(?)을 간다.
여섯 명의 여자가 모여 사는 이 집의 연말은 각자 다른 나라로 뻗어 나간 항공권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연말 계획이란 건 거창한 게 아니었다. 집주인의 방세 알림보다 빠르게 날아온 하루카의 카톡 한 줄.


“한국 가면 마스카라 사 올 수 있어?”

낭만 대신 현실, 우정 대신 뷰티. 해외 셰어하우스의 우정은 화장품 리스트에서 시작된다.

한국 가기 전날 밤, 우리는 부엌에 모였다.
타이, 일본, 한국. 세 나라의 손이 부엌 테이블 위에서 과자를 뜯었다.
과자 봉지를 찢는 소리가 왠지 카운트다운 같았다.

“잘 다녀와.”
“선물 사 올게.”
“마스카라 잊지 마.”


우리의 연말은 샴페인 대신 초콜릿 과자 부스러기 위에서 열렸다.

해외에서 연말을 맞는다는 건, 결국 이런 거다.
인생의 계획은 항공권으로 흩어지고, 관계는 과자 하나로 묶인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나는 문득 깨달았다.
타지에서 살아남는 기술은 영어도, 돈도 아닌 아마 과자 나눠 먹는 기술일 거다.



코스코와 청소, 그리고 귀국 준비의 아이러니

한국에 1년 6개월 만에 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들떠서 발끝이 가벼워졌다.

‘가족 선물은 뭘로 할까?’ 그 고민만으로도 이미 여행의 절반은 시작된 것 같았다.

월마트를 돌고, 코스코를 돌고, 샤퍼스 드러그 마트까지 다녀봤지만, 결론은 코스코였다.
타이 룸메 셀리가 진지하게 말했다.



“귀국 선물은 무조건 코스코지.”

타지에서 오래 산 사람의 한 줄 조언은 늘 실용적이다.

캐나다의 국민템, 피시 오일(오메가 3) 세 통을 카트에 담았다.
할머니와 이모들에게 줄 초콜릿과 사탕도 챙겼다. 연금보다 달콤한 건 초콜릿이니까.

이틀 전부터 짐을 싸고, 드디어 출국 하루 전.
들뜬 마음에 밤새 뒤척이며 생각했다.

‘내일은 드디어 한국이다.’


떠나기 전, 셰어하우스의 룰

다음날 아침, 나는 룸메이트들 몫의 사탕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공항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이 집은 다섯 명이 살고, 나는 한 달 동안 부재.
요리도 안 하고, 쓰레기도 안 만들 텐데…
그래서 나는 떠나기 전에 셰어하우스의 숨은 규칙을 실천했다.

음식물 쓰레기 비우기.
재활용 박스 정리.
화장실 휴지통 비우기.

‘내가 한 달 동안 없어도 이 집이 돌아가는 데 기여한 마지막 흔적.’
타지 생활의 로맨틱한 귀국 준비는 결국 쓰레기통에서 끝났다.



델리 출신의 택시 드라한국행 비행기 전, 인도의 냄새


한국행 우버 안에서

1시 비행기를 타러 가는 길.
짐은 무겁고 마음은 가볍다.
코스코에서 산 오메가와 초콜릿은 캐나다의 냄새를 담아갔고,
쓰레기를 비운 부엌은 조용히 나를 배웅했다.

타지에서 떠나는 순간은 늘 이렇게 현실적이다.
선물은 코스코에서 사고, 이별은 쓰레기통 앞에서 한다.



대한항공은 역시 서비스가 좋았다.

영화와 음악은 취향 저격, 기내식은 입맛 저격.

하늘 위에서 먹는 밥은 왜 더 맛있을까? 아마 탈출 불가능한 환경 덕분일지도.


한국 방문 3일째.
공항의 공기는 사라지고, 이제는 할머니 댁의 된장 냄새가 내 몸에 배어든다.

지금까지 한 일은 놀랍도록 ‘한국적’이다.

할머니 댁 방문, 교회 나들이, 미국에서 잠시 귀국한 이모와의 재회.
교회 지인들과 파주 프로방스를 구경하고, 도서관에서 경제와 육아 관련 책을 빌려 읽었다.
마지막으로 육아 모임 참석.
휴가라고 부르기엔 너무 성실한 스케줄표.

미국에서 온 이모와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찰칵.
한국, 미국, 그리고 캐나다에서 사는 내가 한 프레임에 담겼다.
이건 가족사진이 아니라, 소규모 이민 다큐멘터리 포스터다.

하루가 다르게 지나간다.
이상하게도 타지에서 돌아온 사람에게 한국은 더 빠르게 흐른다.
아마 한국이라는 시간은 항상 ‘놓칠까 봐’ 뛰어다니는 것 같다.



나눔 가게와 노브랜드 버거

어제는 평소처럼 ‘나눔 가게’를 기웃거렸다.
캐나다에서도 이런 곳을 들락날락하며 “내 소비가 누군가에게 돌아간다” 는 착한 자기 합리화 속에서 양심과 쇼핑을 동시에 만족시키곤 했다.

한국에서도 역시 발길은 그쪽으로 향했다.
간판에는 “행복 나눔 가게”.
수익이 소외계층에 돌아간다니, 양말과 속옷을 사면서 괜히 마음 한쪽이 뿌듯해졌다.
이 정도면 소비가 아니라 기부 아닌가?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갑자기 배가 출출해졌다.
그때 눈에 띈 건 캐나다에는 없는 노브랜드 버거.
“그래, 이건 연구다. 문화 비교 체험.”
이유를 붙이고 한 입 베어 물자, 버거는 싸구려의 정직한 맛을 냈다.

타지에서 돌아와도 나는 여전히 비슷한 패턴으로 산다.
도서관, 나눔 가게, 그리고 저렴한 버거.
이게 아마 내가 사는 법일 거다. 어디에 있든.


엄마표 김치의 위력

한국에 오니 제일 좋은 건 단연 엄마표 물김치를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것.
캐나다에서는 늘 같은 브랜드 김치를 사 먹으면서 “이게 최선인가?"라는 생각을 했는데,
엄마가 해준 한 숟갈을 그 모든 고민을 단번에 지워버렸다.

깍두기, 물김치, 열무김치.
이 나라에서만 맛볼 수 있는 ‘제철 발효의 향연’이 식탁 위에서 줄줄이 펼쳐진다.
이건 음식이 아니라 거의 귀국 보너스다.

그리고 확신했다.

세상의 모든 엄마는 5월의 VIP가 아니다. 인생 전체의 VIP다.
항공권보다, 영주권보다, 심지어 영양제보다 강력한 건 엄마표 김치라는 걸 이번에도 증명했다.



윤종신 – 지친 하루. 그날의 플레이리스트는 그 한 곡으로 충분했다.


힘들면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

캐나다에서의 삶이 항상 좋을 리는 없다.
타지에서 사는 건, 때로는 내가 태어난 나라에서 사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들다.
그래도 그 힘듦을 감수하고 내가 있는 곳이 최선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오늘도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내디딘다. 삶은 원래 발바닥으로 버티는 거니까.

윤종신의 지친 하루를 들으면서 문득 생각했다.
가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길을 잃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나는 그때가 바로 쉬어야 할 때라고 믿는다.

한국에서의 4주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만큼은, 계획 대신 매일 눈앞의 순간을 즐기려고 한다.
쉬어간다고 인생이 늦어지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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