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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밥심

근육은 굶지만, 나는 못 굶는다

by K 엔젤

계획이란 이름의 판타지

시간을 쪼개서 할 일을 한다는 건, 계획적이지 않은 사람에게는 참 잔혹한 미션이다.

그리고 여기, 그 미션을 매번 실패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나.

MBTI가 또 소환된다. 그놈의 J와 P.

계획형 J? 충동형 P?
나는 J다. 그런데 파워 J들이 여행 가기 몇 주 전부터 시간 단위로 여행 스케줄을 짜는 걸 보면 숨이 막힌다. 나는 그런 J가 아니다.

세상엔 P 같은 J들이 있다. 나 같은 사람들이다. 계획을 세우긴 세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계획을 세웠다는 데 의미가 있다. 실행은? 글쎄. 그날의 컨디션과 운세와 날씨와 우주의 기운에 따라 달라진다.

반대로, 세상엔 J 같은 P들도 있다. 겉으로는 “계획 따윈 안 해~ 자유롭게 살 거야~”라고 하지만, 실은 머릿속에서 이미 동선을 그려놓고 움직이는 부류다. 계획이 틀어져도 스트레스 안 받는다는 점에서 나랑은 전혀 다르다.


파워 J에 대한 오래된 동경

아마도 공무원 시험, 수능 시험에서 만점 받은 사람들 중에는 현실적이고 체계적인 파워 J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학창 시절 내내 그들을 부러워했다. 반에서 공부 잘하는 애들, 과목별 스케줄을 칼같이 짜놓고 착착 따라가는 애들.
나는 절대 그렇게 못했다. 좋아하는 과목만 미친 듯이 파고, 싫어하는 건 교과서가 눈앞에 있어도 뇌가 자동 차단.

그래서 한때는 ‘계획적으로 사는 법’을 배우면 인생이 바뀔 거라 믿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다이어트 성공하면 인생 바뀐다와 똑같은 판타지였다.


조급했던 20대, 여유를 배우는 30대

30대 중반이 되고 혼자 살아보니 알겠다. 사람이 하루를 시간 단위로 쪼개서 계획대로만 사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기계도 아닌데, 사람이 늘 정확히 같은 템포로 움직일 수 있을 리 없다.

그래서 나는 결론을 내렸다.
“계획은 필요하다. 하지만 느슨해야 한다.”

너무 계획적으로 살면, 정해진 시간에 못 하면 스트레스가 두 배가 된다. 일을 못 한 것도 억울한데, 스트레스까지 덤으로 받는다. 이게 정신 건강에 좋을 리 없다.

그렇다고 아무 계획도 없으면?
하루가 그냥 어영부영 흘러가고 나중에 허무하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느슨한 J식 플랜’을 만들었다.


느슨한 J의 플랜 ✓✓✓

운동 – 아침 6시 유산소+근력 (아침에 못 하면 퇴근 후 근력만이라도)

브런치 글 하나 올리기 – 이건 무조건

일기 쓰기 – 하루에 일어난 일 간단히 기록

버스 카드 충전 – 미루면 꼭 잊는다

11시 취침 – 다음날 계획 다 망가지지 않게

장보기(일요일) –사과, 양배추, 계란, 치즈. 그리고 밥 미리 해두기


이 정도. 거창하지 않다. 거창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지킬 수 있는 최소치를 정하고, 했으면 옆에 동그라미 그려주는 것. 그 작은 동그라미가 주는 성취감이 의외로 크다.


인생은 계획대로 안 된다.

파워 J들도 100가지 계획 다 못 지킨다.
인생은 애초에 계획대로만 흘러가는 시스템이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안도감이 있다.
지키지 못한 계획 때문에 스스로 자괴감에 빠질 필요는 없다. 계획은 지키라고 있는 게 아니라, 살짝 틀어져도 괜찮다는 걸 배우는 용도 같기도 하다.


그리고 오늘의 교훈: 운동은 절대 빼먹지 마라

하루 수백 가지 일은 못 해도, 내가 절대 빼먹지 않는 건 운동이다.
그런데 오늘, 전날 늦게 잤다는 핑계로 아침 운동을 거르게 됐다. 알람을 끄고 30분 더 자버렸다.
아침엔 ‘괜찮아, 하루쯤은 뭐’ 했는데, 점심 지나니까 은근히 후회가 올라왔다.

결국 저녁에 밥 먹고 억지로라도 운동을 하러 나왔다.
그리고 러닝머신 위에서 깨달았다.

“역시 늦더라도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 낫다.
그리고 계획이란 건 결국 이 정도의 꾸역꾸역임으로 유지되는 거다.”


오늘의 동그라미 ✓ 하나 더 추가.

느슨한 J의 소소한 승리.


늦은 밤 시간에도 소제품 보관함에는 빼곡히 채워진 가방들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는 벌써 하루를 마무리하고 돌아갔고, 누군가는 아직 이 작은 가방 하나를 채우며 오늘을 정리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사이 어정쩡한 시간에 서 있었다. 계획했던 시간은 이미 지나갔고, 딱 반 시간 늦은 채로 시작한 운동. 계획표에는 없던 변수가 끼어들 때마다 늘 생각한다. “그래, 이게 인생이지.”

가방을 넣으면서 문득 웃음이 났다. 다들 똑같이 하루를 버티고 있다는 증거 같아서. 늦은 시간, 빼곡한 가방들 사이에 내 가방을 하나 더 밀어 넣는 건 그냥 운동 시작 버튼이 아니라, “나도 오늘 뭔가 했다”는 작은 동그라미 같았다.


운동 후폭풍

운동을 갔다 오니 이게 웬일?
자야 하는데 오히려 힘이 샘솟는다.
러닝머신 위에서 다 쏟아내고 돌아왔는데, 집에 오니 이상하게 몸이 더 깨어 있다.

그래서 평일엔 잘 안 하는 밥하기까지 해버렸다.
대단한 요리는 아니고 그냥 냉장고에 남아 있던 사과를 깎고, 달걀을 삶고, 밥을 지었다.
운동 덕분인지, 아니면 ‘이제라도 뭔가 했다’는 안도감 덕분인지 부엌에서 나는 괜히 부지런한 사람 같았다.

아이러니하다. 운동은 체력을 빼는 건데, 이상하게도 삶의 에너지를 채우는 건 운동 이후다.
오늘도 내 동그라미 하나 추가. ✓
그리고 뜻밖의 깨달음 하나.
“운동은 체력보다 생활력을 살린다.”


운동의 진짜 목적

결과적으로 오늘은 제일 하기 귀찮은 밥을 하기 위해 운동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러닝머신을 뛰며 땀을 흘린 이유가 결국 냄비 앞에 서기 위해서라니.

생각해 보면 우리는 다 먹고살기 위해 운동을 하는 것 같다.
근육을 키우고, 체력을 기르고, 건강을 챙기는 거창한 명분 뒤에는 사실 아주 단순한 이유가 숨어 있다. “죽지 않고 밥을 더 오래 먹기 위해.”

사람들이 그렇게 운동, 운동 외치는 이유가 결국 살기 위해서라는 진리를, 이렇게 허무하게 깨닫다니. 순간 헛웃음이 났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도달한 아주 간단한 결론.
운동은 건강을 위한 게 아니다. 운동은 밥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그 사소하고도 거대한 진리를 깨닫기 위해 나는 또 러닝머신 위를 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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