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국물이 한국인의 혀를 만났을 때
집 주인 아줌마가 단톡에 공지를 올렸다.
“오늘 오후 4시 일본인 룸메이트가 들어올 거에요.”
일본인이라고? 내 머릿속에 즉시 떠오른 이미지는, 얌전하고, 조용하고, 남에게 피해 주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개인주의자였다. 아, 이 집 공기 더 조용해지겠구나.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일본 룸메이트 하루카는 첫날부터 해맑게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다음날 아침, 냉장고 위에는 “다 같이 나눠 먹어요”라는 메모와 함께 빼빼로 한 통이 놓여 있었다. 과자 하나에도 정성을 담는 모습이 귀엽다 못해 약간 감동적이었다.
하루카와 나 사이에는 묘하게 겹치는 것들이 많았다.
고등학교 때 미국 교환학생을 했다는 점, 생일이 똑같다는 점.
그리고 한국 드라마 덕후라는 점. 겨울연가를 다섯 번 넘게 본 사람이 아직 존재한다는 걸 하루카를 통해 알았다. 요즘은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빠져서 대사를 외운다.
며칠 전, 하루카가 비빔밥을 만들고 있었다. 불고기를 볶고, 시금치와 콩나물을 곱게 무치고, 마지막에 계란을 올리는 모습을 보니 잠시 혼란스러웠다. 이건 일본식인가, 한식인가?
그녀는 김치찌개도 자주 끓인다. 일본인 룸메이트가 부엌에서 김치를 꺼내는 장면은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만드는 음식이 덜 한식 같았다. 하루카는 나에게 자기가 만든 김치찌개 좀 맛보라며 나누어주었다.
그날 밤, 하루카의 김치찌개를 살짝 얻어먹고 나니 갑자기 새로운 걸 만들고 싶어졌다. 냉장고를 열었더니 늘 보던 재료들. 두부, 양배추, 김치.
또 김치찌개? 아니, 오늘은 색다른 거!
며칠 전 하루카가 베트남 쌀국수를 해먹었던 게 생각났다. 그래, 오늘은 쌀국수다. 후다닥 치킨 베이스 수프와 면을 사왔다. 돌아오니 하루카는 스파게티를 삶고 있었다.
“너도 오늘 쌀국수 해먹으려고?”
“응! 너랑 다른 맛으로 해볼 거야.”
브로콜리와 새우를 넣고, 스리라차 소스까지 뿌려 완성. 하지만 한 입 먹는 순간, 기대감은 무너졌다. 맛은 있는데 뭔가 100% 안 채워진 느낌. 애매하게 밍밍했다.
내 표정을 본 하루카가 말했다.
“김치 넣어서 먹어봐.”
아, 김치!
김치를 넣자 국물은 칼칼하게 변했고, 쌀국수는 어느새 칼국수가 됐다. 한국인의 혀가 구원받는 소리가 났다.
“쌀국수가 칼국수가 됐네.”
“맞아, 나도 칼국수 알아!”
나는 웃으면서 국수를 후루룩 삼켰다. 하루카는 끝까지 김치는 거절했다.
“나는 이탈리안 스타일 유지할래.”
먹는 걸 진심으로 좋아하는 건 우리의 또 다른 공통점이다.
어느 날 하루카가 오코노미야키를 만들길래 사진을 찍으려 하자, 그녀는 소스와 가쓰오부시를 잔뜩 뿌리며 “이제 찍어!”라고 외쳤다. 음식은 완성되는 순간보다, 완성해가는 그 성의가 더 맛있다.
하루카는 천방지축 에너지를 가진 ENFP다. 하지만 동시에, 부엌에서 김치를 꺼내 내 쌀국수를 구원하는 세심한 배려를 보여준다.
그게 내가 하루카를 좋아하는 이유다.
부엌 위의 다문화주의
여섯 명의 다른 국적의 여자들이 모여 사는 이 집에서, 가장 많이 오가는 건 사실 말이 아니라 음식이다.
국적은 다르지만, 부엌은 결국 같은 냄비 냄새로 물든다.
문화는 국경에서 싸우지만, 배고픔은 부엌에서 화해한다.
그리고 그날, 내 쌀국수는 김치 덕분에 평화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