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K, PASS. 그리고 갑자기 열린 2막
필리핀 강사는 첫날부터 나를 보며 말했다.
“지나, 네가 왜 다시 여기 온 건지 이해가 안 되네.”
중간고사가 끝나고, 기말고사까지 치른 뒤에도 같은 말을 반복했다.
“너 실습에서 떨어질 애 같지 않은데 이상하다.”
순간 웃음이 났다.
‘그래, 나도 내가 왜 다시 여기 있는지 모르겠거든.’
그런데 그 말이 이상하게 큰 위로처럼 느껴졌다.
이번 랩 수업은 처음보다 훨씬 편안했다.
학생들끼리 금방 친해지고, 실수해도 “야, 나도 틀렸어” 하며 서로 웃어넘겼다.
마지막 날엔 강사까지 함께 인도 음식점으로 갔다.
커리 냄새가 퍼지는 테이블에서 다 같이 웃는 그 순간,
‘그래, 이 정도면 다시 시작할 맛은 있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은 무난히 통과했다.
사람은 한 번 부서지고 나면, 이상할 정도로 담담해진다.
처음 만난 실습생들이었는데 이상하게 금방 편해졌다.
실습은 원래 살얼음판 같은데, 이번엔 소풍 온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국 남자분 한 분을 만났다.
“한국에서 왔어요?”
“네, 맞아요. 지금 실습 중이에요.”
“실습 힘들죠? 근데 이 실습만 끝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 몇 마디 한국어가 낯선 공간에서 이상한 안정감을 줬다. 같은 언어가 통하는 목소리는 이유 없이도 묘하게 편안했다.
무엇보다 이번 강사는 지난번과 달랐다. 70살쯤 돼 보이는 흑인+백인 혼혈의 할머니였는데, 엄격하지 않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지나, 완벽은 필요 없어. 안전만 지켜. 나머지는 다 흘러간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 이번엔 실수에 대한 공포 대신 “이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키자”라는 생각으로 움직였다.
엄하지 않은 강사와 유쾌한 실습생들 덕분에 실습 내내 공기는 무겁지 않았고, 오히려 즐겁고 따뜻한 시간이었다.
작은 실습실 같은 시설, 단순한 업무였다. 약 챙겨주고, 밥 챙겨주고, 기본적인 관찰을 하는 것이다.
“이게 다야?” 싶었지만, 그 단순함 속에서 알았다.
“케어는 기술보다 시간을 같이 써주는 게 먼저다.”
입소자 한 분이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너 오니까 이 집이 조용하지가 않네. 밝아졌어.”
웃겼다. 약 챙기고 밥 주는 게 전부인 자리에서 이런 위로를 받을 줄이야.
Assisted Living 에서는 8일을 노인분들과 지냈다.
실습 마지막날에는 한 할아버지가 나에게 "나중에 일하게 되면 여기로 와"하고
그 곳의 사람들과 마지막 작별을 하고 나는 그 곳을 떠났다.
실습 마지막 날, 강사가 내 평가서를 한 장씩 넘기더니 펜을 들었다.
사인 옆에 큼지막하게 적힌 글자. OK. PASS.
“지나, 이번엔 정말 잘했어. 이제 현장에 나가도 되겠다.”
그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허무하게 무너지고, 담담하게 다시 일어서는 이 과정이 왜 이렇게 사람 인생 같을까.
첫 실습에서 탈락했을 땐 진짜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끝이라고 믿은 그 자리가 사실은 시작선이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