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치먼드로 가"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이제 시프트를 기다리는 중이다. 하지만 이곳에 대한 큰 기대는 하지 않기로 했다. 오래 버텨온 사람들만의 서클은 이미 단단히 형성돼 있었고, 신입인 나는 그저 들러리에 불과했다. 스케줄은 seniority 순으로 돌아가지만, 결국 오래된 사람들이 좋은 시간대를 다 차지한다. 나는 늘 남는 자투리만 주워 담는다. 아무리 열심히 하려 해도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필리핀과 인도계 직원이 대부분이라 그들끼리 말도 잘 통하고, 분위기도 이미 굳어 있어 내가 끼어드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다. 때때로 은근한 텃세까지 느껴졌다. 게다가 지역 출신들끼리 이미 자신들만의 ‘빌리지’를 형성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어제, 같은 동네에 사는 네팔 친구 Nir이 연락을 해왔다. 그녀는 여기서 캐주얼로 일한 지 4개월쯤 됐는데, 2주 내내 시프트 하나도 못 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홈케어 경험도 이미 많고, probation도 끝냈으며, 영주권 준비까지 하면서 이 바닥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Nir은 나에게 리치먼드에 있는 롱텀케어 시설을 추천했다.
“나랑 같이 학교 다닌 친구가 리치먼드 XX에서 일하는데, 팀 분위기가 좋고, 엄청 만족하며 다니고 있어.”
알고 보니 Nir은 홈케어, 롱텀케어 센터,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이곳까지 세 군데를 동시에 뛰고 있었다. 한 군데가 막히면 다른 곳으로 돌려가며 버티는 식이었다. 그러면서 내게도 충고했다.
“너도 한 군데에서 캐주얼만 계속하면 금방 지쳐. 정규직 빨리 되는 곳으로 가서 자리 잡아. 리치먼드는 자리도 자주 나고, 살기도 좋아. 너는 리치먼드로 가.”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그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Nir도 나처럼 외국인이고 영어도 완벽하지 않다. 그런데도 여기저기 부딪히며 살아남았으니, 그의 말에는 최소한의 무게가 있었다.
“정규직 빨리 되고 싶으면 거기 넣어봐. 거긴 진짜 바로 연락 올 수도 있어.”
Nir과 긴 통화를 나눈 끝에, 나는 지금 있는 곳에서는 오래 버티기 어렵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긴 시간을 투자해 출퇴근하기보다는, 더 좋은 기회가 있으면 일찍 잡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플랜 B로 그 친구가 추천해 준 곳에 바로 지원했고, 만약을 대비해 그쪽 집들도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사는 아직 보류했지만, 언젠가는 곧 짐을 싸서 다른 동네로 옮길지도 모른다. 어차피 어디서 일하든, 결국은 버티는 싸움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