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586일 차. 오늘은 아침에 모닝페이지를 쓰고 운동을 다녀왔다. 운동은 가기 싫다가도 막상 가면 기분이 좋다. 뿌듯한 마음으로 운동을 갔다가 돌아오는데, 아파트 관리사무실 뒤 돌담 위에서 기시감이 느껴졌다. 내 허리 정도까지 오는 그 회색 돌담 위엔 주홍빛의 무언가가 있었다.
뭐지 하고 다가가 보니 감이었다. 그냥 감이 아니라 찌그러진 감. 왜 여기에 감이 떨어져 있을까? 어떻게 저런 모양으로 찌그러져 있을까? 누가 먹다 남은 것 같기도 하고, 누가 던져서 찌그러진 것 같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위를 올려다봤다.아, 여기. 감나무 밑이구나.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졌다니.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신기했다. 떨어진 감을 목격하다니.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동안 내 주변엔 감나무가 없었던 걸까? 아니면 내가 보기 전에 누군가가 다 치워놨던 걸까? 아니면 그냥, 내가 관심이 없어서 보지 못했던 것뿐일까?
감나무의 감들은 대부분 초록색이었다. 떨어진 감은 완전히 익은 주황색이었다. 성질이 급한 녀석인가 봐. 그렇게 감을 감상하다가 감 사진을 찍고 싶어졌다. 핸드폰 카메라를 켰다. 찰칵, 찰칵. 떨어진 감의 사진을 찍고, 감나무에 달려있는 감의 사진을 찍었다.
10배 줌을 해서 나무에 매달린 감을 찍다가 또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번엔 감의 모양이 좀 이상했다. 동그랗고 예쁜 모양의 감이 아니었다. 게다가 감이 까매졌다, 밝아졌다 했다. 바람에 의해 흔들리는 그림자 같기도 했다. 그런데 흔들린다기에는 어떤 리듬감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감이 아니라 감 뒤의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한참을 핸드폰 액정을 통해 바라보다 그게 새라는 걸 알아챘다. 새가 감 위에 앉아 감을 쪼아 먹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서있던 위치에서는 새의 부리와 꼬리만 보였다. 새가 있다는 걸 알고 나자 들리지 않던 새소리가 들렸다. 짹짹, 짹짹. 너무 신기하고 신이 난 나머지 사진을 더 열심히 찍었다. 찰칵, 찰칵. 동영상을 찍을까? 찰칵, 찰칵. 아니, 그냥 연속 사진으로 찍자.
그렇게 사진을 찍다가 한 장은 건졌겠지, 하고 핸드폰 화면을 껐다. 뿌듯한 마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가다가 문득 뒤를 돌아 감나무를 봤다. 그런데 웬걸, 이 각도에서 보니 아까 그 새가 풀샷으로 잘 보였다.
급하게 다시 핸드폰 카메라를 켜고 새를 찾아 핸드폰을 움직였다. 10배 줌을 하니 새가 어디 숨어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위로, 옆으로, 아래로, 핸드폰을 움직였다. 아무리 찾아도 새는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 액정엔 씨앗이 훤히 보이는 새가 먹던 감만이 남아 있었다.
문득, 떨어진 감 생각이 들었다. 아까 떨어져 있던 감은 새가 먹던 감이구나. 자신의 한쪽 면을 새에게 내어주고, 남은 한쪽이 무거워 기울어지다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진 것이겠구나. 분명히 맛있게 잘 익은 감이었겠지. 그래서, 그렇게 맛있어 보였던 거구나.
감, 색깔이 참 예쁘다. 감잎 색깔은 감처럼 예쁜 주황으로 변한다던데. 언제쯤 그 주황을 볼 수 있을까? 감색으로 변할 감잎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