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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레매거진 Jun 22. 2021

멋지게 늙는다는 것

<뜨거운 스페인, 민박집언니둘 4_>

<뜨거운 스페인, 민박집 언니둘 Prologue_>

<뜨거운 스페인, 민박집 언니둘 1_(앨리스 Part 1_)>

<뜨거운 스페인, 민박집 언니둘 2_(메이 Part 1_)>

<뜨거운 스페인, 민박집 언니둘 3_(앨리스 Part 2_)>

여기 바르셀로나는 내게 멋지게 늙기 좋은 환경이다. 굉장히 자극적이다. 스페인의 느리게 흐르는 시간은 적당한 여유를 가질 수 있게 해 주고 그 여유는 내가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게 만들어 내 몸, 나의 생각, 감정에 충실하게 된다. 보고 느끼게 되는 것도 나에게 집중하였을 때 인지할 수 있듯이. 


<뜨거운 스페인, 민박집 언니둘 4_>

- 메이 Part 2_


메이 #4. 멋지게 늙는다는 것

한날은 여유롭게 바르셀로네타 해변을 거닐다가 두 할머니가 벤치에 앉아 노을을 즐기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들은 나란히 앉아 아무 말 없이 석양에 물든 바다를 바라보며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는 앨리스에게 묻는다. 


"금발 할머니 할래? 은발 할머니 할래?" 


 앨리스는 씨익 웃으며 은발 할머니를 골랐다. 


"그럼 나는 금발 할머니 할게, 우리 진짜 멋지게 늙자!"


같은 것을 보고 비슷한 생각을 할 때가 많다. 내가 굳이 저 뜬금없는 질문에 대한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앨리스는 질문의 의도를 바로 알아채고 답한다. 이게 바로 소울 메이트. 

우리는 두 할머니가 왜 멋있다고 느꼈을까. 일단 한 가지는 확실하다. 분명 물질적 풍요로움이 주는 아우라는 아니었다. 짧은 문장력으로 이 느낌을 형용하자면, 노을을 즐기는 여유로운 마음과 정신적 풍요로움으로 단단해진 건강한 자아에서 발현되는 그런 '멋'이었다. 


며칠이 지나도 여운이 가시질 않는다. 큰 목표나 야망 없이 그저 흐르는 대로 오늘의 행복을 좇아 살던 내게 처음으로 장기 목표가 하나 생겼다. '멋지게 늙고 싶다는 것'.  


여기 바르셀로나는 내게 멋지게 늙기 좋은 환경이다. 굉장히 자극적이다. 스페인의 느리게 흐르는 시간은 적당한 여유를 가질 수 있게 해 주고 그 여유는 내가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게 만들어 내 몸, 나의 생각, 감정에 충실하게 된다. 보고 느끼게 되는 것도 나에게 집중하였을 때 인지할 수 있듯이. 

그리고 사람들의 활발한 표정, 건강한 피부색, 살가운 말투, 맛있는 음식, 화려한 색감 등 흔히 말하는 한시적 유럽뽕도 한몫 하지만 계기가 무엇이든 다각적 자극으로 나를 깨우고 변화시키는 장소임은 틀림없다. 여기에서 나는 생각하고 있었고 고로 존재함이, 살아있음이 느껴진다.  



메이 #5. 잘 있나요 작명왕 천씨

게스트하우스 이름이 필요하다. 이건 런던에서부터 생각을 해보았지만 쌈빡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의 이니셜을 따 'M&M'? 컬러풀한 초콜릿의 힘을 빌려볼까. 아니면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언니네'? 아쉽게도 유사한 상호가 이미 있다. 그럼 노는 게 제일 좋은 '뽀로로 민박'? 하. 유치하다.

하도 답답한 마음에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도 물어보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았지만, 역시나 대부분 "음 글쎄?"라고 되물어 온다. 하긴, 내 일도 아니고 잠깐 스쳐 지나가는 사람을 위해 머리를 짜내어 줄 거라는 기대가 과했다. 세비야에서 만난 천씨에게도 별 기대 없이 대화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작명에 도움을 청한다. 


이에 천씨는 잠깐의 고민 후 '바르셀로나' 이니까 '바르셀 누나'가 어떠냐고 던져주었다. 오 제법 위트 있다. 게다가 누나라는 왠지 묘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뉘앙스도 마음에 든다. 나는 조심스럽게 주워 담았고, 내가 보답할 수 있는 소소한 한식 한 끼를 대접하였다. 


그날 밤 얼른 앨리스에 동의를 구했고, 이 날부터 우리 집은 비로소 <바르셀누나네>가 되었다고 한다. 천씨의 아이디어를 정말로 쓰게 된다면 꼭 출처를 밝히겠다고 대답했기에 이 기회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당신의 센스, 최고예요 (쌍엄지)



메이 #6. 무적의 메이와 앨리스

한국에 돌아왔고 지금부터는 시간이 금이다. 앨리스의 빡센 계획을 따라가다 보니 여권에 비자 페이지가 생겼다(여담이지만 한껏 힘주고 사진관에서 찍은 내 비자사진과는 반대로 앨리스는 청량리역 즉석사진에서 마치 북에서 건너온 사람처럼 날것 그대로 찍힌 사진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여 큰 웃음을 주었다. 내가 왜 웃는지 본인은 잘 모르는 듯하다. 우리는 닮았지만 각자의 색이 확실히 짙음을 또 한 번 느끼는 부분이다). 

새로움에 설레는 나와 달리 앨리스는 왠지 심란해 보인다. 아마 나를 이 판에 끌어들인 이상 잘 해내야만 하며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나의 선택이었고, 선택에 대한 책임은 본인에게 있는데도 말이다.


나에게 바르셀로나 게스트하우스는 책임이기보다 새로운 경험의 기회였다. 두려움? 그것은 6개월의 현지 트레이닝에서 이미 다 사라진 지 오래였고, 대신 무엇이든 하면 다 된다는 무모한 용기가 장착되어 돌아왔다. 한 단계 성장한 메이와 앨리스다. 다 드루와. 


우리의 인연은 강렬했지만 짧았기에 서로의 가족들에게 인사도 드릴 겸 앨리스의 동해 시골집으로 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남자 친구의 어머니를 뵙는 듯이 떨렸다. 일주일 간 앨리스 어머니 따순 밥을 먹으며 합숙했고 세부계획을 준비해나갔다. 생각보다 할 일이 많다. 앨리스는 서울생활 정리부터 게하 오픈까지의 예산을 짠다. 

그녀의 날카로운 계획성이 없이 나의 무모한 용기만으로 도전했다면 아마 비행기도 못 타고 와르르 무너졌을 듯싶다. 나는 앨리스가 책정한 예산으로 저비용 고효율을 뽑을 수 있는 컨셉을 구상하고, 홍보 마케팅을 담당했다. 


사실 집계약도 전이라 홍보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했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나가려고 한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컨셉을 정하고 자잘한 편집 이미지를 SNS에 올렸다. 생각보다 반응이 좋다. 지인들의 응원으로 저 멀리에 짙은 안개가 걷히고, 한줄기 햇살이 드리우는 듯하다. 감사함으로 눈물이 한줄기 또르르 흐른다. 



메이 #7. 비워내는 시기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탓에 작은 집에서 맥시멈 라이프를 살고 있었지만 드디어 비워낼 때가 되었다. 사실 미리부터 정리했어야 하는데, 또 출국이 임박해서야 정리하는 나란年도 대단하다. 10년 정도 자취를 하면서 불어날 대로 불어난 나의 짐들을 서둘러 정리해보기로 한다.


커다란 캐리어가 게스트하우스를 위한 짐들로 금방 가득 찼고, 맥시멈리스트는 강제로 미니멀해져야만 했다. 무엇을 담을까. 당연히 최근에 구입한 새 물건 위주로 챙기게 될지 알았지만, 의외로 오래된 물건들이 담겼다. 간택받은 것들을 조금 언급하자면, 9년 된 검정 비니, 6년 된 선글라스, 7년 된 체크코트 등등. 비우려 보니 가장 소중한 것들이 보인다. 

관계도 그렇다. 스물아홉의 나는 요즘 새로운 인연을 만들기보다는 소중한 사람들을 잘 지키고자 한다. 정리하고 비워내는 시기 다음엔 비워진 만큼 새롭고 좋은 것들이 채워지는 시기가 오려나 하며.



메이 #8. 힘들 때 웃으면 일류라던데

바르셀로나로 출국 전날 앨리스가 우리 집으로 왔지만, 아직도 정리가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고운 입으로 거친 욕 한 사발을 내게 건네주고선 빠르게 정리를 도와 1시간 내로 정리된 듯하다. 그렇게 오래된 구의동 집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홀가분히 가볍게 공항으로 갔으면 좋으련만 너무 욕심부렸나 보다. 짐이 버겁게 많다.

근데 힘들기는커녕 커다란 짐 사이에 파묻힌 작은 앨리스가 웃기다. 작지만 강하고 빠른 앨리스. 이때는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우리는 주로 힘들 때 이상하게도 웃음부터 나왔다. 적어도 마인드는 일류인 듯하다. 다만 전제는 ‘함께일 때’이다. by 벨레 매거진


*<뜨거운 스페인, 민박집 언니둘>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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