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스페인, 민박집언니둘6_>
오, 주여! 부처님, 알라신, 감사합니다! 나는 무교인데 신을 찾아 감사를 전하고 싶을 정도로 뭔지 모를 무언가에게 감사하다.
<뜨거운 스페인, 민박집 언니둘 6_>
메이 #9. 어쩌면 당연했던 온갖 어려움들
29kg 캐리어, 8kg 백팩, 그리고 비장의 박스. 나름 자취방을 여러 번 옮겨본 나기에 이 정도 짐은 거뜬히 옮기겠거니 생각했던 과거의 나야... 너의 생각이 아주 많이 짧았더라. 당장 이 짐을 가지고 인천까지 가는 길마저도 계단과 경사로 아주 험난하다. 비행기 탑승 전부터 어깨와 팔근육이 쑤셔온다.
‘얼른 수하물로 부쳐서 털어내 버려야지.’
그러나 수하물 창구에서 우리는 벙쩌버렸다. 30만 원 주고 주문 제작한 네온사인이 특수화물로 취급되어 운송비 30만 원이 부가된단다. 게다가 유리 재질이라 운송 중에 파손될 수도 있다고.
시동을 걸자마자 급발진으로 뒷 범퍼를 긁은 기분이다. 정작 우리는 저가항공을 타고, 수하물 추가도 아꼈는데, 불쑥 60만 원으로 뛴 소품을 고집하기엔 너무 미안한 마음이다.
‘... 버릴까?’
입 밖으론 나오지 않고 작은 마음의 소리로 앨리스에게 물었다. 앨리스는 이런 내 고집스러운 마음을 알아챈 건지, 참 민망하게도 시원하게 말한다.
"야 뭘 어째, 가져가야지. 결제해!"
너무 고마웠지만 13시간 비행 내내 깨지지 않을까 마음을 졸였다.
바르셀로나 공항 도착 후, 멀리서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나오는 60만 원짜리 박스에게로 달려가 바로 개봉해보니 무사하다. 다행이었지만 이 정도는 예상치 못한 일의 시작 축에도 못 들었다.
메이 #10. 믿었던 파파고와 글로벌한 구글 번역의 배신
아는 에스파뇰이 올라! 께딸? 아디오스뿐. 어떻게 부동산 문을 두드리겠나. 먼저 스페인판 직방 어플을 뒤졌고, 파파고와 구글 번역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아 겨우 중개인을 만났다.
그들은 친절했지만 간단한 영어도 알아듣지 못하여 어플의 도움을 받아 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파파고와 구글은 이해를 돕기는커녕 속수무책으로 더 깊은 미궁 속으로 빠뜨려 어색한 웃음으로 대화를 마무리하기 다반사였다. 여행 때는 무리 없이 번역해주었는데 왜 알아듣지 못하는 거지.
이 난관을 미리 알지 못했던 부분은 아니기에 한국에서부터 통번역에 도움을 구했지만, 대부분 우리에게 부담스러운 금액으로 답하여 답답했다. 그러던 참에 한줄기 빛처럼 반가운 연락이 왔다. 역시 우리의 인복이 바르셀로나에서도 빛을 발하나 보다.
그는 바르셀로나 대학교에서 공부 중인 유학생이었고, 인생의 절반 이상을 에스파뇰을 사용하여 원어민 수준의 회화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더불어 좋은 인상과 꼼꼼한 성격까지! 정말 감사하게 저렴한 금액으로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그의 도움으로 처음보다 수월하게 여러 집을 꼼꼼히 볼 수 있었고,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았다. 이 친구 없이 파파고와 구글과 함께 집을 구했다면 사기를 당하고, 거지가 되어 강제출국당하지 않았을까 싶다.
메이 #11. 두 개의 집
꽤 많은 집을 보았고 우리 마음속에는 단 두 개의 집이 남았다. 그 사이를 갈팡질팡 하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상반되는 매력이 있는 두 집이었다.
기호 1. 좁은 골목에 빈티지한 그라피티가 매력적인 포근한 구시가지의 집.
: 가까운 해변과 아기자기하고 오래된 가게들, 이 동네 너무 좋아
기호 2. 큰 도로에 웅장한 천고의 격식 있고 안전한 유럽식 신시가지의 집.
: 관광지에 좋은 접근성, 줄지어 있는 명품샵, 너무 안전해 보여.
앞서 앨리스 이야기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우리는 따뜻한 느낌을 선호하기에 기호 1번 집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또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살고 있어 자연히 스며들기 좋은 분위기이다.
한국이었다면 고민 조차 하지 않고 바로 1번 집을 택했겠지만 여기는 바르셀로나다. 소매치기가 일상이며, 아직도 강도들이 들끓는다고 한다. 둘 다 지갑을 털려본 기억이 문득 떠오르자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포근한 것도 안전할 때나 느낄 수 있다. 괜스레 우리의 결정이 더욱 타당할 수 있게 1번 집의 단점들을 따져본다.
“그 있잖아, 골목에 물 고여 있는 게 빗물이 아니라 다 오줌이래. 그리고 앞집 살림살이가 뭔지도 다 보이고 말이야. 별로야”
솔직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아쉽긴 하다. 벗겨진 페인트가 주는 세월의 멋. 각각의 집마다 개성 있는 그라피티들. 작은 대문을 열고 나와 오래된 노천카페에서 볕을 쬐며 커피 한잔과 크라상을 든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아, 바로 1번 집이 우리가 원하는 바이브임에도 안전해야 감성도 즐길 수 있겠지 하며 아쉬움을 툭툭 털고 2번 집 계약에 돌입한다.
메이 #12. 피 말리는 집 계약. 면접 심사 중입니다.
스페인의 시간은 느리게 간다고 말했었던가.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경우 집 계약까지 무려 한 달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왜인가 했더니, 이곳은 세입자가 법적으로 유리한 부분이 많아 유독 까다롭게 따져보고 사람을 들인다고 한다.
집주인은 부동산을 통해서만 우리와 소통하길 원했고, 부동산 담당자는 마치 면접관처럼 엄격하고 차갑게 대했다. 우리는 이에 질 수 없어 마치 취준생처럼 열정적으로 셀프 어필했다.
큰 집이고, 또 낯선 동양인이어서 그랬던 것일 수 도 있지만 그들의 물음에 우리의 답을 전하고 서류를 증빙한 후, 다시 그들의 회신을 받으려면 적어도 최소 2~3일은 소요됐던 것 같다.
마음을 정하고 나면 계약부터 입주까지 1시간이면 넉넉한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 한 일이다. 주로 중개인이 집을 어필하면 했지, 세입자가 입주를 위한 셀프 어필이라니. 계속된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은 지 2주 정도가 지났으려나. 앨리스의 두통은 나날이 심해졌고 잠을 잘 자지 못해 얼굴에 그늘이 짙어졌다.
그래 쉬운 게 없지. 집 나오는 순간부터 웰컴 투 고생길, 가시밭길이지.
별 하는 것 없이 우리는 하루 온종일 그들의 답을 기다리는 일밖에 안 하는데 왜 이렇게 힘든 거지.
메이 #13. 꼬레아나 왕초 게스트
3주 차 돌입. 심사가 연장전으로 들어서는 바람에 예상 준비기간이 늘어져 우리는 점점 지쳐갔고, 지갑도 볼품없이 홀쭉해졌다. 이 말인 즉,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것. 그나저나 꼴이 말이 아니다. 짐을 싸서 더 저렴한 숙소를 옮기는데, 문득 마트 카트에 짐을 싣고 떠도는 거지가 연상된다. 아, 우리는 카트마저 없어서 짐을 이고 지고 옮기니 그보다 더 처량하다.
도착한 숙소는 부동산과 가까운 혼성 16인실이다. 난생처음 다양한 외국인들과 남녀노소 온갖 체취 아니 악취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사람에게도 이런 냄새가 나는구나 하는 악취 가득한 숙소에서 일주일을 보내야 한다.
우리는 늘 같은 옷을 입었고, 마트에서 단돈 3유로로 파스타 재료를 사서 호스텔의 너덜너덜한 식기로 조리하여 끼니를 때웠다. 하지만 와중에 알뜰히 군것질거리도 사서 먹었다.
살아보니 또 살아진다. 이런 호스텔 생활이 익숙해지고, 자주 마주치는 친구들과는 인사를 주고받는다. 그러다 한 친구가 말을 걸어왔다.
“너 이 옷 정말 좋아하는구나, 매일 이 옷만 입네?”
그의 눈에 악의는 없어 보이지만, 이상하게 너무 속상하다. 이 순간 우리는 꼬레아나 왕초 게스트가 된 거 같다.
메이 #14. 눈물의 계약 끝, 신에게 감사를
마지막까지 불안하게 다른 세입자와 우리 중에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참나! 우리가 뭐, 이 집 아니면 갈 곳이 없ㅇ...없다. 플랜 B로 우리를 스쳐 지나간 집들을 다시 떠올려 보며 마음을 접으려는 순간, 띠링-. 메일이 왔다.
계약날짜가 잡혔다. 한밤 중 16인실 2층 침대에서 우리는 입을 틀어막고 손뼉을 치며 기쁨에 날뛰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부동산에서는 세상 차분하고 또한 도도하게 계약을 마치고 열쇠를 받은 메이&앨리스.
오, 주여! 부처님, 알라신, 감사합니다! 나는 무교인데 신을 찾아 감사를 전하고 싶을 정도로 뭔지 모를 무언가에게 감사하다.
메이 #15. 마법의 오렌지색 물약 (광고 아님)
집 계약만으로도 만신창이가 되어버려서 이대로 뻗고 싶었지-만, 너무나 적날히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커다란 집을 보니 가만있을 수 없다. 자, 이제 본격 시작이다.
(자꾸 끝은 없고, 계속 시작만 하는 이 느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도대체 우리가 언제 게하 운영을 시작하는지 끝없이 낚이고 있는 중. 우리의 고생담을 더 들어주기를 바라.)
꼼꼼한 앨리스가 계약을 리드했다면 지금부터는 내가 하드 캐리 할 차례다. 이 큰집에 당장 우리 두 몸 뉘일 침대도, 밤이 되면 조명도 하나 없기에 드러눕는 것은 사치다. 각각 캐리어를 끌고 이케아로 향한다. 전시일을 할 때도 그랬듯 여전히 나에게 공간을 채워가는 일은 설레고 즐거운 일이다.
침실부터 주방, 화장실, 조명 등등 게스트하우스의 구색을 갖출 아이템들을 매일같이 사다 날랐고 도착해서는 조립과 설치를 한다. 이러다 보면 금세 밤이 찾아왔고 저질체력 우리는 쓰러져 기절한 듯이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이면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프다. 이마저도 처음 느껴보는 고통이기에 웃기고 재밌다.
몸살로 사경을 헤매던 앨리스가 아침 일찍 약국에 다녀오더니 정체불명의 오렌지색 물약을 사 왔다. 유명한 자양강장제라고 한다. 이런 걸 돈 아깝게 왜 사 왔지 했지만, 매일 밤 마법의 물약을 먹고 눈을 뜨면 약효가 좋은 것인지 이상하게 몸이 가벼웠다.
집이 점점 구색을 갖춰가니 앨리스의 불면증과 두통은 씻은 듯 사라졌다. 내일 드디어 첫 손님이 온다. 이상 스페인 호스트가 되기까지의 기나긴 길이었다. 경 오픈 축. by 벨레 매거진
*<뜨거운 스페인, 민박집 언니둘>은 계속됩니다.
<지난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