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마트 쌀 코너에 가보면 몇 년 전보다 더 다양한 쌀이 진열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이천쌀, 김포쌀처럼 지역 이름이 붙거나, 간척지 쌀 해풍 맞는 쌀처럼 재배환경의 특징이나 우수성을 강조한 이름이 쌀 이름으로 사용됐다면 요즘은 여기에 신동진, 참드림같은 쌀의 품종을 강조하는 분위기다. 같은 지역이라고 품종이 다를 수 있으니 그만큼 쌀 종류가 많아지는 셈이다. 이 중에 상표명인지 품종 명인지 모를 하나 있는데 바로 영호진미다. 영호진미는 쌀 품종의 이름이다. 이전에 쌀 이름들은 왠지 연구소에서 지은 듯한 느낌이었다면 이 영호진미는 마케팅 담당 부서에서 지은 것 같은 이름이다. 일단 어떤 쌀인지 알아보자.
개발 배경
영호진미가 개발된 건 2003년~2004년이다. 보통 각각 특성이 있는 두 개 이상의 품종을 교배해가며 신품종을 개발하게 되는데 영호진미는 우리나라에서도 제법 알려진 일본 품종인 히토메보레와 병충해에 강한 품종인 주남벼를 교배해 만들어진 품종으로 2000년대 후반부터 본격 재배되기 시작했다. 남부 평야지역에서 재배하기 좋도록 개발된 품종이니 당연히 영호남 남부지역에서 많이 재배되고 있이만 최근에는 경기도에서도 재배된다. 올해 경기도 이천쌀의 48.4%는 영호진미라고 한다.
영호진미 이전에 영남지역에서 많이 재배되던 쌀은 ‘새누리’라는 품종이었다. 이 새누리는 다수확 품종으로 2014~2017년도 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품종의 쌀로 전체 벼 재배 면적의 20% 내외가 키워졌었다. 새누리는 다수확 품종이고 재배도 안정적이었지만 중부지방에서 키워지는 삼광이나 고시히카리 같은 품종에 비해 밥맛 평가가 떨어진다는 평가가 있었다. 이 평가를 받는 이유 중 하나가 더 뜨거워진 남부지방의 기후변화 문제이다. 벼는 일교차가 큰 곳에서 재배되는 게 밥맛이 더 좋은 편인데 영남지역은 벼가 익어가는 가장 중요한 시기인 8월 중하순의 밤 기온이 상당히 높다. 일교차가 크지 않다는 것이다. 이 높아진 밤 기온이 밥맛을 떨어뜨렸다는 것.
이 열대야 즈음에 벼의 성장에 대해 새누리와 영호진미를 비교해 보자. 새누리는 벼 이삭이 나오는 시기 (출수기 하고 한다)가 8월 16일이다. 한창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시기다. 반면 영호진미는 출수기가 8월 21일로 새누리에 비해 5일이 늦다. 바로 이 5일이 막 나오는 벼 이삭에게는 아주 중요한 시기로 새누리와 영호진미의 밥맛을 차이 나게 한 것이다. 영호진미는 뜨거운 밤 기온을 피해 일교차가 더 큰 8월 하순, 즉 쌀알의 외관이나 밥맛이 더 좋아지는 환경에서 자라게 되니 이전에 영남지역에서 재배되던 다른 품종보다 영호진미가 더 밥맛이 더 좋아지게 된 것이다.
이미지 출처 - 월간 원예
영호진미의 성장
또 최근에 여러 지자체에서 공공비축미에서 새누리를 제외하고 영호진미를 새로 선택하고 있어서 새누리는 점차 재배면적이 줄고 영호진미는 급상승하는 효과가 나타났다. 공공비축미는 정부, 지자체가 일정량의 쌀을 시장가로 사서 시장가로 다시 판매하는 제도. 비숫한 제도로 이전에는 추곡수매 제도라는 게 있었다. 보통은 공공비축보다는 추곡수매라는 말을 더 익숙할 수 있다. 추곡수매는 정부가 정한 가격에 쌀을 매입하는 제도로 쌀값이 워낙 생산가를 밑도는 일이 있어서 정부가 시장가보다 높은 가격으로 쌀을 매입해 농민들의 소득안정과 식량의 수급안정을 위한 제도였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세계 무역기구 WTO 체제가 되면서 이 추곡수매가 국제 무역을 왜곡시키는 보조금 (엠버 박스라고 한다.)에 해당되어 폐지되고 2005년부터는 공공비축제도로 바뀌게 된 것이다.
쉽게 말해 새누리는 정부에서 매입을 안 해주는 품종이 된 것이고 영호진미는 새롭게 정부에서 매입을 해주는 품종이 된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 이렇게 여러 재배환경도 좋아지고 변화된 기후에도 대응해 밥맛도 좋은 영호진미가 마트나 인터넷 쇼핑몰에서도 자주 눈에 띄게 된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쌀도 이렇게 국제관계, 자연환경, 소비자의 기호에 따라 변화를 하게 된다. 이제는 양보다는 맛과 영양, 즉 품질을 위주로 육종, 개발되는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소비자의 선호도에 따라 재배, 보급량에도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영호진미의 맛
물론 제도의 뒷받침으로 영호진미가 많이 키워지고 유통되는 것만은 아니다. 역시나 맛이 없으면 선택되지 않는다. 영호진미는 상당히 좋은 맛의 고품질 쌀로 평가받는다. 밥맛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인 단백질 함량이 6%로 다른 품종에 비해 낮다. 단백질 함량이 낮을수록 밥맛이 좋다고 하는데 다른 품종인 남평이 6.6%, 호품이 6.5%, 칠보 6.4% 등이다.
밥을 지어보니 일단 시각적으로 윤기가 있고 촉촉한 느낌이 든다. 씹는 식감이 부드러우면서도 적당한 찰기가 있으며 무엇보다 입안에 남는 은은한 단맛이 좋다. 특별하지 않아도 '딱 맛있는 밥이다'라고 느껴진다. 찰기가 적당하고 입안 퍼지는 단맛이 아주 좋으니깐 자극적인 반찬보다 그냥 김치하나 올려서, 아니면 김에 싸 먹어도 좋다. 생선구이가 추가된다면 금상첨화다 싶다.
이 영호진미의 특징 중 하나는 시간이 지나도 색도 잘 변하지 않고 맛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 보통 전기밥솥도 사용설명서를 보면 밥을 한 뒤 12시간 정도까지만 보관하라고 나와 있다. 끼니때마다 밥을 해 먹는 게 제일 좋겠지만 바쁜 일상에서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니깐 이 영호진미처럼 밥맛이 오래 유지되는 품종을 선택하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