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닮았던

중학교 친구

by 명희

생일날 비발디의 <<사계>> LP판을 들고 친구가 찾아왔다. "난 봄이 좋아. 너는?" 친구 덕분에 비발디를 좋아하게 됐다. 친구를 만난 건 중학교 2학년 가을. 일본에 있다 한국으로 전학 와서 쇼트커트 머리가 아직 단발로 자라기 전이었다. 첫날 70명이나 되는 학생이 작은 책상 앞에 빽빽이 앉아 있던 게 놀라웠다. 맨 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친구가 뒤를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나도 전학 왔어."우리는 전학생이라는 낯섦 덕분에 친구가 됐다. 아이들은 머리 모양이 달랐던 나를 “일본 아이”라고 불렀다. 그럴 때마다 친구는 내가 한국 아이라고 바로 잡아줬다. 다른 반 아이들은 키가 큰 친구가 언니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닮았다고 했다.


학교가 끝나면 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걸어가서 친구는 버스를 타고 나는 길을 건너 집에 갔다. 때로 서로의 집을 방문해서 함께 공부했는데 가까운 우리 집보다 친구집에 더 자주 놀러 갔었다. 친구는 큰 이층 집에 살았다. 대가족이어서 결혼한 오빠도 있고 조카도 있고 대학에 다니는 언니 오빠가 있었지만 집은 조용했다. 언젠가 설날 아침부터 친구집에 갔다가 떡국을 먹었던 게 기억난다. 내 입맛에는 약간 비누맛 같은 게 느껴져서 남겼는데 친구 식구들은 모두 아무 말없이 잘 들었다. 우리 집에선 맛있는 음식도 때로 불평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친구 아버지는 늘 조용했다.


친구와 나는 중학교 이후 같은 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달랐다. 그러나 우리는 일 년에 두세 번 만났고 친구가 다니던 여대 앞에 유명했던 쫄면집이 있어서 쫄면도 처음 먹어봤다. 졸업할 즈음 친구는 친구의 아버지처럼 은행에서 일하게 됐고 나는 졸업한 다음날 미국에 갔다. 그리고 일 년에 세네 번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1984년 남편과 약혼하러 한국에 들렀을 때 친구도 은행에서 만난 사람과 결혼을 앞두고 있어서 커플로 만남을 가졌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꿈궜던 가정을 설계하며 한껏 들떠 있었다. 얼마 후 친구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아파트 입구에서 걸음마를 하는 아이와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2년 후 첫 임신 소식을 전하자 곧바로 순면 배냇저고리와 손 싸개 등을 잔뜩 보내줬다. 당시 미국에는 순면 손 싸개를 구할 수 없었는데 친구가 보내줘서 얼마나 잘 썼는지 모른다. 얼마뒤 친구는 강남 작은 아파트를 팔고 신도시 큰 아파트로 이사 간다고 했고 또 얼마 후 남편이 지방으로 발령받아 내려간다고 했다. 그런데 그 후 연락이 끊겼다. 전화도 안 되고 편지도 없었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친구가 다녔던 대학에 찾아가 연락처를 문의했지만 학교도 연락처가 없다며 오히려 나보고 소식이 닿으면 학교에 연락해 달라고 했다. 어떻게 된 걸까?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 찾는 걸 중단했다. 마지막 소식을 전한 게 31년 전. 둘째 돌상을 차리느라 한참 분주했던 아침 친구와 마지막 통화를 했었다.


따져보니 우리가 함께 학교를 다닌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다. 중학교 때 일 년 조금 넘는 시간. 그런데도 그 후 20년 가까이 만남을 이어 갔던 거다. 친구는 역사를 잘했고 나는 영어를 잘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잘하는 걸 서로에게 가르쳐줬다. 친구면서 경쟁 상대이기도 했다. 친구보다 1점만 높아도 내심 기분이 좋았다. 다른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서로의 성적을 확인했다. 친구 덕분에 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친구 덕분에 세계명작도 많이 읽었다. 11월 7일 친구의 생일 즈음엔 친구가 생각난다. 친구야, 되돌아보니 너를 만난 게 운명이었던 같아. 친구가 되어줘서 고마웠고 행복했어. "나도 봄이 좋아."

keyword
작가의 이전글<<오리엔탈리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