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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운 Oct 04. 2023

시간여행, 그 애애한

이효석과 메밀꽃 필 무렵

시간을 따라 문학의 감성도 나이가 드나 보다.

감동이 농밀히 여물어가는 걸 느낀다.

목덜미가 저릿해지는 절세의 표현들도 더 밀도 있게 다가온다.

그 감성을 여행 중 다시 만났다.  

이효석 문학관 곳곳 품고 싶은 유물의 문장들을 만나며 뭉근한 감동에 여러 번 빠져 들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 마음을 오래 잊고 있었구나.

교복 시절 밀접했던 우리의 관계는 졸업과 동시에 소원해졌다.

필독서의 구애에서 벗어나 선택의 자유를 찾게 되면서부터였다.

허나 생각해 보면, 나는 이청준 작가의 담백한 듯 감성적인 문체를, 김종삼 시인의 맑고 가난한 시를 좋아했다. 소설 '눈길'의 말미에서 많은 눈물을 흘렸던 것도, '메밀꽃 필 무렵'을 읽으며 달밤의 서정과 반전의 서사에 감탄했던 시간을 잊고 있을 뿐이었다.


조선달 편을 바라는 보았으나 물론 미안해서가 아니라 달빛에 감동하여서였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앞장선 허생원의 이야기소리는 꽁무니에 선 동이에게는 확적히는 안 들렸으나, 그는 그대로 개운한 제멋에 적적하지는 않았다.


고개 너머는 바로 개울이었다. 장마에 흘러버린 널다리가 아직도 걸리지 않은 채로 있는 까닭에 벗고 건너야 되었다. 고의를 벗어 띠로 등에 얽어매고 반 벌거숭이의 우스꽝스런 꼴로 물속에 뛰어들었다. 금방 땀을 흘린 뒤였으나 밤 물은 뼈를 찔렀다.


나귀가 걷기 시작하였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 오랫동안 아둑시니같이 눈이 어둡던 허생원도 요번만은 동이의 왼손잡이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_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하나의 사물에 여러 개의 생명을 품은 공감각적 묘사에 다시금 애애해 진다.

어쩌면 이것은 시간 여행일 지도 모르겠다.

허생원의 이야기에 취한 내가 달빛 흐드러진 메밀밭 사이를 걷고 있다.

고개를 돌리자 둥근 안경테의 남자가 서 있다.  

그의 시선이 그립고 다정하다.

(맨 오른쪽: 전시관을 돌고 나오니 한 아이가 반듯한 자세로 책을 읽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인상 깊어 담은 사진 한 장도 함께) Photo  by  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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