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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로 Jul 22. 2021

여름 한 잔




뜨겁지 않던 적 없는 계절 

여름이기에 더 의미 있는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해변과 
따가운 여름 햇살의 우산이 되어주는 구름과 
빈 통에 꼭꼭 담아 쌓아 가는 모래성이 있어 

이 덥고 습한 여름이 
청량하게 추억되는 게 아닐까 

푸르지 않던 적 없는 시절 

존재만으로도 의미 있는 
여름 햇살처럼 반짝이는 이 시간에 
일기장 한편 추억의 글감이 되어주는 인연들 
한 자씩 꾹꾹 적어 내려가는 기분들과 함께 

힘들고 벅찬 지금이 
청춘으로 추억되었음 좋겠어 






기억의 미화


장마가 끝나고 폭염을 조심하라는 안전 안내 문자가 오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습하고 무덥고 조금만 움직여도 숨과 땀이 차는 '여름의 정석'같은 날씨가 지속되는 중이다. 그냥 가만히 숨만 쉬어도 옷이 땀으로 젖는 날씨에 벌레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져 공포에 떨게 하는 계절인 여름은 무더위를 피해 떠나는 휴가가 있어 추억이 가장 많이 쌓이는 계절이지만 올해에는 시국이 시국인지라 아쉽게도 추억을 쌓을 여행을 못 떠날 뿐만 아니라 계획조차 못하고 있다.


집에 있는 사진앨범에는 바닷가와 계곡에서 찍은 어린 시절의 사진들이 많다. 그때의 여름방학은 평소에는 꿈도 못 꾸는 기차여행을 떠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강릉 고모댁을 가기 위해 무궁화호 열차를 탔다. 햇빛 아래에 오래 있어 피부가 벗겨지고 땀띠가 났지만 강릉 바다에서 모래성을 쌓고 물놀이를 하고 계곡에서 누가 더 많은 다슬기를 잡는지 시합을 하던 추억이 생생하다.


지금도 나는 여름 바다를 좋아한다. 여름의 바닷가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하지만 몸을 스치는 짠 바닷바람과 발가락을 간지럽히는 모래와 파도가 기분이 좋아 자주 가는 편이다. 가서는 주로 바닷가를 걸으며 조개를 모은다. 주워온 조개들은 깨끗하게 씻고 말려서 플라스틱 테이크아웃 컵에 담아서 보관 중이다. 하나하나는 어디서 주웠는지 못 알아보고 기억은 못하지만 담긴 조개들을 보고 있으면 여름의 바다가 떠올라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여름의 더위와 습도, 끈적임은 싫지만 그래도 여름이 청량함으로 추억될 수 있는 건 여름의 바다와 더위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름의 공기는 괜히 설렘을 준다. 비오기 전과 비 오고 난 후 하늘을 가득 덮는 구름과 운이 좋으면 볼 수 있는 무지개는 여름의 자연 안에서 또 다른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게 만든다. 


여름이기에 의미 있는 물놀이, 사람이 북적이는 바다에서 플라스틱 통에 꼭꼭 눌러 담아 쌓아 가는 모래성, 깨지지 않고 예쁜 모양을 찾아가는 조개,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나뭇잎, 여름의 상징인 매미소리와 장대 빗소리, 통에 곱게 잘라 넣은 수박까지. 더위에 지치고 힘들었던 기억들은 다 희미해지고 땀범벅이 되어 마신 한 잔의 물처럼 고통 가운데 행복했던 감정들만이 크게 남아 다시 또 여름을 기다리게 한다.





청춘은 여름의 다른 이름


청춘. 듣기만 해도 설레는 이 단어를 직역하면 푸른 봄이지만 청춘과 가장 어울리는 계절은 여름이지 않을까. 봄이 주는 부드러운 느낌보다 여름의 뜨겁고 치열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색으로 미화되는 점이 청춘과 닮았다. 나의 10대 후반부터 20대까지도 그랬다. 불안하고 초조하고 어려웠지만 그때의 좋은 사람들과 경험했던 것들은 좋은 추억으로 새겨져 그때를 함께 겪었던 사람들과 좋은 이야깃거리와 내 일기장 한 편의 기록이 되었다. 


여름의 덥고 습하고 끈적거림 가운데 짭짜름한 바다 내음과 넘실대는 파도, 귀를 귀찮게 하는 갈매기와 매미소리, 제철인 달콤 시원한 수박과 기운을 얻으려고 먹는 삼계탕이 다시 기다려지는 것처럼 그동안 살아온 환경을 벗어나 새로운 사람들은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하며 처음 마주한 것들을 감당하며 얻은 슬픔과 고통은 흐려지고 잘 버텨내고 성장한 모습에서 오는 아름답게 미화된 기억이 남을 것이다. 돌아보았을 때 아름답게 추억될 지금의 순간도 그 어느 날의 여름 햇살처럼 반짝이는 시간이겠지. 


여름은 어차피 뜨겁지 않았던 적 없었던 계절이니 뜨거울 걸 걱정해봐야 두려움만 커져갈 뿐이다. 뜨거움을 감당하고 싶지 않아 집안의 에어컨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뭐 그것도 좋은 휴식은 되겠지만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두고두고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 역시도 만들기 어려울 것이다. 경험을 통해 몸소 체험한 깨달음은 또 다른 도전을 할 원동력이 되니까 말이다.


추억을 쌓기 위해서 더위를 감수하고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처럼 좋아하는 걸 위해서 좋아하지 않는 일도 감당해야 만한다. 벌써 10년째 친하게 지내고 있는 친구들은 내가 고된 입시미술을 겪고 대학을 들어가서 함께 야작과 졸작, 조별과제들을 헤쳐나가며 맺어진 인연이고 야근을 혐오하던 내가 대안학교에서 밤늦게까지 동료 교사들과 머리를 맞대고 기획했던 수업들은 그 뒤로 일한 교육기업, 미술학원, 디자인 회사 그리고 지금의 직장('기억의 빨강' 글을 쓸 때 디자인 회사를 퇴사하고 이직을 한 상태였다.)에서 내가 해낸 수많은 기획들의 근간이 되었다.


그 외에도 원던 원치 않던 사회에 내던져져 경험했던 많은 일과 인연들은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새로운 도전을 해본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되 너무 많은 후회와 질척임을 남기지 않기. 지금 그대로를 온전히 누리고 즐기면 그 안의 정말 보물 같은 추억을 얻어낼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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