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희생해 본 적 없는 사람

받기만 하다가 엄마가 되어서

by 아마추어리


아! 나는 여태껏 얼마나 공주처럼 살아왔는가. D+44일. 애 밥 주고 트림시키고 기저귀 가는 일상에 지독한 권태를 느낀 어느 날이었다. 막 태어난 아기가 마냥 신기하고 재밌는 것은 잠시. 이제 아이에게 모든 초점을 맞춘 일상이 적게는 몇 년 많게는 사는 내내 지속된다고 생각하니 삶의 허무함과 무력감이 밀려왔다.

밖에 나가 새로운 사람과 어울리고, 직장에서 내 두뇌를 사용하고 또 뽐내고 싶었다.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육아를 한다는 것은 나를 희생하는 일이었다. 평생 창작을 업으로 또 취미로 삼던 사람이 오로지 기다리고, 인내하는 일뿐인 육아를 해야 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따분할 뿐이었다. 이렇게 힘들기만 하고 재미없는 인생을 살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스스로 희생한 기억이 잘 없다. 돈에도 인색한 편이고 베푸는 것보다 받는 것에 더 기뻐하는 편이었다. 남자 친구이자 남편은 항상 나에게 져줬고, 동생들은 돌본다기보다는 심부름시키는 편에 가까웠으며 부모님은 또 말해 뭐 하랴. 처음으로 해보는 희생에 그저 얼떨떨한 것이다.

많이 내려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재미없는 일상을 사는데도 그만한 보상이 없었던 이유는, 내가 지금의 일상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희생이라는 말은 그 가운데 ‘자발적’이라는 단단한 기둥이 서있는 느낌이다. 뭔가 손해보고 갖다바친다는 느낌이지만 그로인한 득이 필연적으로 있다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나의 희생은 자발적이라는 뚝심이 없고 어딘가 툭 치면 스러질 것 같은 모양새이며 산후도우미님과 남편이 양 옆에서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신체는 피로에 휩쓸리고, 정작 얻어갈 감정과 보람은 전혀 모른 채 나라는 영혼은 멀건히 세워두었달까.

자랑은 아니지만 특출히 예뻐서도, 잘나서도 아닌 요즘세대의 딸들이 이렇지 않을까 싶다. 받고 사는 것에 익숙해서 난감할 수많은 초보엄마들이 떠올랐다. 우리, 오늘만 다르게 생각해 봐요. 이번이 첫 희생타이밍인 거면 그동안 얼마나 편하게 살아온 인생인 거냐며. 우리 얼마나 복 받았던 거냐며. 어찌어찌 시작하게 된 첫 희생을 슬프게만 받아들이지 말고 좋게 바꾸어보자며. 다가올 100일의 기적과 풍부한 모성애와 행복한 가정생활을 위해서 오늘도 함께 기꺼이 버텨보자며.


아빠에게 전화해서, 잠들기 전에 남편에게, 은근슬쩍 물어보는 밤을 가져야겠다. 어떻게 희생하는 삶을 사셨는지, 항상 져주는 것은 어떤 마음인지.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이기적인 엄마가 더 잘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