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마추어리 Nov 16. 2021

(03. 단풍과 노인) 지는 아름다움에 대하여

아빠의 환갑잔치에 가는 길, 택시 안에서


단풍과 노인


겨우 비가 온다고

날 키운 비가 온다고


마침내 색을 낸 가지를 깎아내는

당신은 얼마나 오래

세상을 지내셨는지요


쨍 노란 빛깔

나는 여린 노른자같지만

사실은 따스함의 종말을 앞둔

건조한 기둥에 불과합니다


야, 노란 눈이 내린다


나는 마침내

침침한 그의 망막에

가을의 빛깔을 모두 태우고


가로수를 깎는 노인의 길을 따라

한 세상 함께 저물어가오니


떨어지는 은행잎 아쉬워하는

어린 이들을 위로해주시오.


당신은

지는 아름다움을 알려주고 가시오.




 지겨운 만원버스 출근길, 가을이 오고 소소한 행복이 생겼다. 녹번역을 지나 산골고개를 넘어 독립문으로 가는 길에 줄지어 선 은행나무잎이 노랗게 익었기 때문이다.


 아빠 환갑잔치를 위해 고속버스터미널에 택시를 타고 가던 날, 여느때처럼 창밖을 바라보는데 은행나무들이 가지째로 잘려나가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나이 든 아저씨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저 윗둥부터 단 칼에 은행잎 100장은 우습게 댕강댕강 날려버리고 있었다.


"은행나무 단풍 보는 게 낙이었는데, 왜 자르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아까워요."


"내일부터 비가 와서 미리 자르는 거죠. 저기 강원도 가는 길에는 모양을 동그랗게 해서 엄청 예쁘게 해놨더라고요."


 택시 아저씨는 물론 옆에 앉은 동행인은 단풍이 아깝다는 내 말에 무섭게 반박했다. 아름다운 것들이 비소식에 잘려 나가는 것이 아까웠을 뿐인데, 그리고 애초에 은행나무를 키운 것은 촉촉한 봄비와 장맛비가 아니었던가.


주말에 비가 온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이렇게 빨리 작별인사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젖은 은행잎이 도로를 난감하게 만들 순 없으니 손을 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난히 이성적인 이들 앞에 차마 비 얘긴 더 하지 못하고 다른 말을 꺼냈다.


"그러고보니 올 해에는 가족들이랑 단풍놀이도 못갔네"


 작년 추석때였던가, 아빠가 후두암 진단을 받았다. 첫 수술을 받고 몸이 어느정도 회복됐을 무렵, 본가인 대전에서도 조금 귀퉁이에 자리한 고모댁으로 밥을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네비게이션이 잘못됐네. 이 길이 아닌개벼. 거기, 거기서 우회전 해서 골목길로 들어가봐라."


 누구보다 그 길을 잘 알아도 알았을 아빠는 자꾸만 후미진 길로 운전하라고 동생을 재촉했다. 네비게이션은 자꾸만 빨간 경고창을 띄웠고, 차는 단풍으로 물든 도솔산 자락으로 진입했다.


"가게는 딱 몇 년만 더 하고, 이런 데 와서 집이나 짓고 조용하게 살련다."


 그 말을 하고 아빠는 노을이 지는 차창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봤다. 창문도 열고, 난생 처음 보는 무언가를 관찰하듯이, 빤히. 그리고 우리 남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당신이 조금이라도 더 깊은 사색에 잠기도록 옆을 지키는 일에만 집중했다.


 무르익는 가을 풍경을 보며 황혼의 부모를 떠올리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세월과 자연앞에 가지치기를 당하고, 사라져가는 일에는 감히 대입해보고 싶은 용기가 나지 않는다. 자식들의 심경이 이러한데 아픈 아빠 본인의 마음은 얼마나 복잡할까.


 낙엽이 지는 이유는 나무가 겨울을 대비해 나뭇잎의 영양소를 모두 기둥으로 비축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무는 다가올 계절을 알기에 황혼에 다다라서도 예쁜 색을 낼 수 있던 것이다.


 고모댁에서 식사를 마치고 본인이 운전대를 잡은 아빠는 불과 몇 시간 전의 능청이 무색하게 네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대로 빠르게 도로를 질주했다.


 그래도 사람은, 알고도 모른체하고 싶은 때가 있나보다.


 세월을 지나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풍경과 아버지를 보고 세상에 묻고 싶어졌다. 아버지, 당신은 도대체 삶의 어디까지 알고 계신지. 아름답게 저물어가는 일은 대체 어떤 것인지.

이전 09화 [사랑이 없다면 길을 잃지 않을 테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