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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추어리 Sep 07. 2022

[사랑이 없다면 길을 잃지 않을 테지]

굽이굽이 돌아가지 않을 테지


사랑이 없다면

길을 잃지 않을 테지

굽이굽이 돌아가지 않을테지

서성이거나 재촉하는데

시간을 쓰는 일도 없을테지


먼 길을 떠날 일이 없을테지

약속하는 일도

그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다가

잠깐 잊었다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일도


사랑은

비효율적인 것

맹목적이고 수고로운 것


무엇을 위해

그 긴 생을 낭비했느냐 하면

답할 수 있는 오롯이 개인적인 것


사랑스러운 것



사랑은 낭비다.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고, 사랑은 자기가 아닌 다른 모든 것들을 낭비케 한다.


얼마전엔 아빠가 병원 정기검진 일로 서울에 올 일이 있어서 모처럼만에 온 가족이 밥을 한 끼 하기로 했다. 아빠는 이른 아침부터 차를 몰고 대전에서 서울까지 운전을 했다. 대중교통을 못 타는 큰 딸은 은평구에서 아산병원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 검진은 10분도 안되어 끝났고, 우리는 여의도로 가기로 했다. 삼남매가 모두 서울에 있다고 해도 강서구, 영등포구, 그리고 은평구에 흩어져 살고 있어 약속장소를 잡기 애매했다.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운전자와 함께 신호등을 확인하고 네비게이션을 수시로 체크해줘야 한다는 사실은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한참 뒤에나 알게 됐다. 사회 초년생 시절 택시 조수석에 앉았는데 안전벨트 매는 것을 까먹어 괜히 기사아저씨께 한마디 들은 적도 있었다. 아무리 운전에 문외한이어도 '운전을 하는 일'도 어쨌든 일이라 눈치코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사회생활을 하고 나서야 알았다.


자동차 공업사를 수십년 운영하며 자동차와 운전에 관해서라면 누구보다 자부심이 센 아빠의 옆 좌석에 앉아서 나는 그저 철없는 딸래미가 되어 이런저런 얘기에 심취해 있었다. 워낙 말수가 적기도 한데다 뒷좌석에는 예비 사위가 앉아 있어 입을 꾹 다문 아빠를 살살 건드려 재미난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게 재미있었다. 그러는 동안 아빠는 복잡하고 꽉막힌 서울 도로를 한참이나 헤매고 있었다. 건너지 않아도 될 한강을 건너고 있을 때에야 아차, 했다. 아무리 제 동네 도로사정을 훤히 알고 있어도 아빠한테는 복잡한 서울 초행길이었던 거다.


나는 뒤늦게야 네비게이션을 확인하고 로타리를 빠져나가는 방향과 우회전해야하는 골목들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별안간 네비게이션을 욕하는 아빠를 보며 시끄러운 딸내미를 옆에 두고 지금까지 많이도 헤맸구나 하는 생각에 울컥해졌다. 밥은 한 끼도 못 먹고 암 검진을 받으면서 마음을 한참이나 졸인 후에 강남에서 여의도로 가는 초행길, 그러나 모처럼만의 가족외식을 위해 운전을 안할 수도 없고 또 길이 어렵다고 말도 못하는 아빠의 마음이 덜컥 다가와 무겁게 내려 앉았다.


아빠를 위해 퇴사하고 본가에 내려갈 준비를 하는 막내는 회계학원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식당에 먼저 가서 줄을 섰다. 검찰 공무원으로 전날 당직을 하고  시간 남짓을  장남은 다시 출근길을 지나 잠을 쫒으며 식당에 와 았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도톰한 복어튀김이 반쯤 식어 있었다.


"이제 내어주세요."


장남의 든든한 한 마디로 복어 지리가 곧바로 나왔다. 왜 이렇게 늦었냐는 동생들의 투정에는 "강남 차막히는 거 알잖아"라는 말로 일축했다.


저마다 고생길을 달려온 우리는 따끈하고 맑은 복지리를 복스럽게도 먹었다. 복어지리는 아니어도 찌개나 오이냉국 따위를 한 대접에 놓고 네 숟가락으로 삼시세끼 퍼 먹던 때가 있었는데. 막내는 국물로 해장을 하고, 장남은 토실한 살코기로 잠을 깨우고, 나는 미나리로 지친 마음을 해독했다. 어느 밥집을 골라도 더 맛있는 집을 안다며 투덜대기 일쑤인 아빠도 그 날은 뚝배기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복껍질무침까지 싹싹 긁어 먹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너는 요즘 뭐하냐, 앞으로의 일정은 뭐냐, 하는 물음에 반쯤의 정직, 그리고 반쯤의 하얀 거짓말로 대답하는 대화들 사이에서 생각했다. 사랑은, 이렇게 시시한 걸 하기 위해서 아주 먼 길을 찾아 오는 거라고. 사랑은 이렇게 평범한 대화를 하기 위해서 잠을 자지 않는 거라고, 사랑은 금방 식는 따뜻함을 잠깐 맛보기 위해서 고생스럽게 길을 헤매어 오는 거라고.


몇 년 전부터 운영해온 남매계로 시원하게 밥값을 계산하고 아빠가 돌아갈 길을 계산해봤다. 익숙한 경부고속도로를 타기 전까지 아빠는 혼자서 몇 번이나 길을 헤맬까. 무표정으로 이를 쑤시며 인사하고 뒤도는 아빠의 뒷모습에서 사랑이라는 것이 보였다. 한결같이 무뚝뚝하고 시니컬한 당신이 한없이 사랑꾼으로 느껴졌다.


별개의 얘기지만 나와 남자친구의 첫 만남 장소는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이었는데, 그때 우리는 자그마치 4시간을 엇갈렸다. 대구에서 4시간을 품고 온 남자친구의 너무 오래된 핸드폰은 서울에 도착하기도 전에 방전이 됐고, 나는 상대방의 핸드폰이 꺼진 것을 알고도 장장 네 시간을 플랫폼에서 멍때리고 앉아 있었다. 지금은 농담삼아 "내가 그때 그냥 집에 갔어야 했는데"라고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놀라운 일이다. 그때 나는 왜 그 미친놈을 욕하면서 그냥 집으로 가지 않았는지. 그리고 남자친구는 네 시간 동안 어떤 마음으로 터미널을 헤매고 다녔는지.


사랑이라는 게 참 신기하고 바보같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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