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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추어리 Oct 13. 2022

[시각의 잔치] 일상을 감명 깊은 순간으로 만드는 힘

일상을 위로하는 시, 어디까지 만나보셨나요

시각의 잔치


오전 열 시, 광화문광장에 선 청년은 나태주를

오후 네시, 서점 일을 보는 그녀는 김소연을

새벽 두 시, 한자에 골머리를 앓는 국문학도는 백석을


눈에 넣고 굴려보다 마침내 감내하는 순간

흘러가던 시간은 날카롭게 기억될 시각이 된다


강변북로에 갇힌 운전자에게 한강을

시골집 막내에게 김개미를

눈요기로 던져주고 싶은 밤


이상의 시에 찍힌 점처럼

인간의 머리수는 많고


사랑의 기쁨과 외로움과

토할 것 같은 심장과 처음 만난 무기력과

그럼에도 살아갈 용기와

그 속에서 치솟는 오기를

만나는 시간이 저마다 달라서


너의 분침이 갈 때

나의 초침이 오기도 하여서


시인은 분주하고

시는 매 초마다 살아있다




사소한 일이 우리를 위로한다.

사소한 일이 우리를 괴롭히기 때문에

- 파스칼 -


위 명언을 참 좋아한다. 내가 가진 괴로움이 아주 사소한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유튜브에서 행복의 크기를 높이려면 소소한 기쁨을 누리는 순간, 그 순간의 빈도수를 높여야 한다는 내용을 접한 적이 있다. 기억에조차 남지 않을 만큼 하루에도 수십 번 그런 일을 만들라는 것이겠지만 내게는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있다.


어느 겨울,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나는 신촌 알라딘에서 몇 권의 책을 팔아 그 달의 가스비 낼 돈을 만든 뒤에 버스를 타고 마로니에 공원으로 가고 있었다. 교양수업 리포트를 쓰러 가는 길이었는데, 학교 앞 홍대 카페에서 했어도 될 일을 굳이 굳이 명문대생이 즐비한 대학로까지 과잠바를 입고 버스에 올라탔다. 무료하게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우연히 한강의 <서시>라는 시를 읽고 울음이 터졌다. 흐느끼는 소리를 내면서 엉엉 울었다. 시 한 구절이 내 인생과 운명을 관통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위로를 받았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게 오롯이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눈물을 흘린 것은 그때 이후로는 없다. 그런 일이 있었다. 시 한 구절에 길 한복판에서 울음을 터뜨린 순간이 있었다.


또 하나는 최근의 일인데, 서점에서 일하는 친구 하나가 김수영 시인에 대한 얘길 했다. 언어영역에 흥미를 가진 나는 그 시절 문학 지문에 나올 법한 시들은 모조리 외우고 다닌 터라 바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에 대해 얘기했다. 이미 김수영의 시집 몇 권을 탐색하던 친구는 그날 그 시를 처음 만났다. 언제 읽어도 좋은 시지만, 그날은 유독 날카롭게 다가왔다. 회사에서 일어난 몇 가지 찝찝한 일을 정서 한가운데 깔아 두고 재미난 이야기를 찾아 카톡창과 카톡창을 번갈아가며 '사소한' 재미난 이야기를 구걸하던 날에 곱씹어보기 제격인 시였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시라는 장르가 내가 사랑하는 만큼 세상의 주류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삶의 기억할 만한 한 순간에 꼭 시 한 편은 있으리라 생각했다. 70 먹은 할아버지가 술 마시고 읊조리는 옛날 시, 막 상경한 경상도 소년이 광화문광장에 서서 마주치는 교보문고 현판의 시, 문학소녀를 꿈꾸는 고등학생이 달달 외는 시까지. 그 시의 작자와 메시지와 논조는 수없이 다양할 테고, 또 그걸 담는 시각의 풍경도 전혀 다를 테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재미났다. 시인은 한때의 감상으로 그 순간을 바쳐 한 작품을 써냈을 것이다. 그걸 1년 뒤에 누군가 서점에서 본다. 몇 년 뒤에는 또 누군가 헌책방에서 본다. 또 몇 년 뒤에는 누군가 광화문 현판에서 본다. 시인이 담아낸 순간의 정서가 다양한 시간과 시각에 제각각 살아있다. 그래서 시인은 그 시를 쓴 것을 잊고도 자기도 모르게 바쁘다. 시는 살아서 자기가 필요한 마음에 가서 닿는다. 한 시대의 파편처럼, 인파 속을 부유하다 꼭 맞는 마음에 심어지는 민들레 홀씨처럼.


세상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만큼 저마다의 시간도, 시각도 천차만별이다. 그렇게 전혀 다른 생을 사는 사람들이 하나의 시를 각자의 시간에 마주한다. 그러면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남이 아니게 된다. 그 시를 만난 같은 '순간'을 보낸 동지가 된다. 그때는, 이제 그들이 조금은 비슷한 생을 살았다고 표현해도 될 것 같다. 시에는 그런 힘이 있다. 한 줄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힘. 짧지만 강렬한 순간을 만들어주는 힘. 사소하지만 위로가 되는 순간을 만들어주는 힘.


 모든 것은 앞서 말한 행복론과연결된다. 바람도 차가워지고 따뜻한  당기는 계절, 아무쪼록 기쁨의 빈도를 늘리기 위해 일상 속에 시를  많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다. 별수없이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지는, 분주하고 시시한 일일초같은 하루하루를 산다고 해도 매일 그날의 꽃은 피워내는 삶을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시가 아니더라도 일상을 순간으로 만드는 '계기(이를테면 좋은 사람과의 깊은 대화, 기억에 남을 식사자리 )' 많이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마지막으로 수십  필사했던, 내가 정말 좋아하는  하나를 소개하 글을 마친다.




일일초

                           호시노 도미히로


오늘도 한 가지

슬픈 일이 있었다.

오늘도 또 한 가지

기쁜 일이 있었다.


웃었다가 울었다가

희망했다가 포기했다가

미워했다가 사랑했다가


그리고 이런 하나하나의 일들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평범한 일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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