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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추어리 Aug 14. 2024

<잠입>-1

2024년 5월 21

 땀에 젖은 채로 게임을 하러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가는 상춘의 발에 택배 박스가 턱 하고 걸렸다또 올 택배가 있었던가하지만 택배는 늘 그런 식이므로 집으로 들어와 박스를 뜯었다각종 랜선과 충전기정체 모를 아답터가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핸드폰 충전기 선을 주문하면서 이것저것 담아 주문했나 보다그런데 이 업체는 포장도 제대로 안 하고 쓰레기도 막 섞어서 보내네내가 어떤 일 하는 사람인 줄 알고상철은 적당히 필요한 선만 꺼내고 비웃듯 박스와 남은 물건을 그대로 신발장에 던져두었다     


2024년 5월 22

미연의 집으로 택배가 도착했다미연 아빠는 무겁고 큰 박스가 잘못 도착했고비싼 가전품이나 데스크탑 본체라 생각했다그런 것에는 도가 터 지겹다고 고개를 저었다누군가 찾아가길 바라고 며칠 두었는데도 안 사라져서 들여다보니 송장에 낯익은 주소가 적혀 있었다     


 어찌나 따분한 여름인지. 선풍기나 에어컨을 틀어도 아득한 더위가 몰고 오는 따분함은 식혀지지 않았다. 영어 단어장을 펼쳐서 이것저것 발음해본다. 계속해서 흐르고 또 빠르게 증발 되는 땀처럼 잠깐 존재하다 마는, 머리나 마음에는 박히지 않는 소리뿐이다. 아직은 오후 6시, 상춘이 메신저에 접속하기까지 30분 정도가 남았다. 


 시간을 허투루 쓰면 안 되기 때문에 이참에 영어 이름을 지어보기로 했다. Mia. 미연이라는 이름과 비슷한 발음이 났다. 나는 금세 한 인격을 만들 수 있는 초인텔리전트 인재다. 공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상춘은 늘 말했고 나도 언젠가는 미국에서 아주 재미있는 삶을 살겠다는 계획이 있다. 거기서는 따분한 것들을 모조리 버리고 새로 시작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영어 공부를 꾸준히 해둬야 한다. 혼잣말하는 습관은 이럴 때 큰 도움이 된다. 가끔은 노이즈 캔슬링만 켠 이어폰을 꽂고 하고 싶은 말을 되는대로 영어로 씨부린다. 그러면 등하굣길에도 열심히 쉐도잉하는 대견한 어린애로 보인다. 바보 같은 사람들. 그게 다 자기들 얘기인 줄도 모르고.          


2024년 5월 8

상춘은 머리를 대각선으로 구부려 대충 인사하고 허겁지겁 건물을 빠져나왔다겨드랑이는 땀으로 젖고 자꾸만 숨소리가 크게 났다지하철 좌석에 앉자마자 메신저 어플을 켰다종일 다섯 마디밖에 안 했지만퇴근 후에 미아와는 1,000마디도 넘게 주고받는다여고생이지만 똑똑한 데가 있고 말도 잘 받아쳐 준다집에 돌아와서는 컴퓨터를 켜고 큰 화면으로 대화를 하다가 자기 전에는 다시 핸드폰을 붙들고 메신저를 한다원룸에 혼자 산 지 3년이 됐지만요즘에는 하나도 외롭지 않다.          


 간장은 참 이상하다. 아무리 넣어도 간이 싱겁고 색깔만 거무튀튀해진다. 오늘도 조미료 줄여보기는 실패로 끝났다. 결국 아빠가 시킨 대로 미원을 잔뜩 넣은 동태탕을 완성했다. 아빠는 맛있게 먹을 테지만 난 국물은 먹는 척만 하고 미나리나 대충 집어 먹어야지. 어제는 미나리라는 영화도 봤으니까. 나의 미국 생활은 어떨까? 상상만 해도 향긋하다.


 창밖이 벌써 어둑어둑한데 아빠는 올 생각을 않는다. 전화는 걸어봤자 5초 안에 끝날 게 뻔해서 괜히 베란다만 어슬렁거린다. 사실 매번 음식을 만들어 둬도 숟가락 두 개가 동시에 들락날락 한 적은 거의 없다. 이렇게 기다리다가 혼자서 밥을 먹고 소파에 누워서 상춘한테 하소연하다가 잠드는 날이 더 많았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떠서 티브이 선반 아래 서랍을 열면 2만 원 혹은 3만 원 정도가 들어 있다. 그걸 꺼내서 쓰고 다 떨어져 열어보면 또다시 돈이 채워져 있다.


 아빠는 늘 그랬다. 무엇이든 돈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가난함은 상처가 되지 않았지만 이런 점이 궁금했다. 늘 어떻게든 돈을 벌려고 살면서, 왜 중요한 일은 또다시 돈으로 해결하는 걸까. 시간을 낼 수 없거나 관심을 주지 못하는 때에도 아빠는 돈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밖에 눈이 많이 와서 데리러 오라고 했을 때도 택시비를 송금해주고, 졸업식에 오지 못할 때도 꽃다발의 2배에 달하는 돈을 손에 쥐어 줬다. 유용하게 쓰긴 했지만 그건 잘못된 방식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차라리 더 가난해서 돈도 못 받는 편이 나았다. 나는 가끔 돈이면 다 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서랍으로만 소통이 가능한, 그러니까 무슨 동태탕 창구 접수원 같은 사람도 아니다. 그리고 아빠는 나의 가족이다.


 창밖의 사람들이 하나둘 아파트 단지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퇴근하는 사람들 눈이 듣던 대로 동태눈을 하고 있었다. 역시 한국에서 취업해봤자 저런 삶 밖에 살 수 없을 테지. How poor are you! 바디랭귀지를 연습하는데 소매에 고춧가루 국물이 벌겋게 물들어 있다. 웃긴 일이다. 냄비 안의 동태 눈알이 꿈뻑꿈뻑 하는 것 같다. 창밖의 세상이나 냄비 안이나 미국이 아니라면 다 똑같다.          


2024년 5월 9

상춘은 미아의 끓어오를 듯한 분노의 채팅을 유심히 살펴봤다공부할 겸이라면서 중간에 영어 단어를 섞어대는 바람에 계속해서 번역 버튼을 눌러야 했지만그녀도 동태탕은 그냥 동태탕이라고 쳤기에 그 점만은 편했다얼굴은 언제 보여줄 거냐는 압박이 오기 전에 대화를 끝내고 싶었지만오늘도 덫에 걸리고 말았다상춘은 아직 차도 없고 아는 맛집이라곤 다인상가 앞 돈가스집 밖에는 없기에 거절했다상춘은 그냥 이대로가 좋았다.          


How dare are you! 새벽에 도어락 소리에 잠깐 깬 기억이 들어서 오늘도 아빠 얼굴을 못 보는구나 싶긴 했다. 에어컨을 안 켜두고 잤더니 동태탕은 하루 사이에 손도 못 댄 채로 시큼한 냄새가 올라왔다. 서랍에는 5만 원이 채워져 있었다. 이건 앞으로도 ‘아무도 먹지 않을 음식을 해두고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하루’가 좀 더 길게 지속될 거라는 암시였다. 맛있게, 아니 맛없게라도 먹고 가지. 먹기라도 하고 가지. 침대에서 자라고 말은 걸어보지. 요란하게 씻기라도 하지. 눈이라도 마주칠 시간을 만들기라도 하지.


 순간 나는 아빠를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잠깐의 건조한 대화조차 못 한 지 2주가 지났다. 차라리 아예 혼자였으면 덜 외로웠을 거다. 나를 외롭게 하는 건 그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꾸만 이런 게 생기고 나에게 오기 때문이다. 5만 원 권은 만 원이나 천 원권보다 빳빳하고 접힌 자국도 별로 없다. 벽돌 색깔 같기도 하고 동이 트거나 해 질 무렵의 하늘 색깔 같기도 하다. 인자한 신사임당의 미소는 고고하다. 아빠는 5만 원권 뒤에 어떤 고고함을 숨겨두고 있나. 무슨 중요한 일을 하기에 왜 삶은 안 살고 자꾸 돈만 벌어다 주는가. 밥 벌러 가는 가장의 무게를 생각하면 가엾기도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때리고 외치고 소리치고 싶다. 아버지. 도무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아버지의 집 밖의 일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내게로 올 시간이 없다면 직접 그리로 가주지. 그리고 아주 소중한 것을 선물해줄 거다. 당신이 잊고 있는 것. 돈보다 더 중요한 게 뭔지. 그걸 알게 되면 더이상 돈을 벌러 갈 힘도 없을 것이다. 초인텔리전트한 계획이 떠올랐다. 가슴이 두근대서 미칠 것 같다.     


2024년 5월 10

상춘이 일하는 곳에는 그와 비슷한 사람이 많다전자상가에서는 물건 주문이 들어오면 일산 창고나 인근에 있는 소매창고에서 물건을 떼 오는데 옮길 수량이 많고 무게가 나가는 것들이 많아서 끌차를 잘 끌 수 있는 단순한 덩치가 최고의 인재상이다종일 전표를 뽑아서 물건을 챙기고 택배 박스를 나르다 보면 겨드랑이며 사타구니며 땀이 줄줄 새서 온몸이 땀으로 젖는다상춘은 그런 모습이 부끄럽지도 자랑스럽지도 않았다.          


 Project name: Find Father. 아빠를 찾아서 떠나는 여행이라, 생각보다 근사해서 프로젝트 명을 지었다. 배낭여행용으로 사둔 가방에 소지품을 챙겼다. 영어공부 책 한 권이랑 회색 후드 집업(잠입을 하려면 Time, Place, 또 O로 시작하는 단어... 그런 것에 맞춘 복장이 필요하다), 대용량 보조배터리, 기자 수첩과 볼펜, 냉수를 꽉 채운 텀블러 같은 것들을 챙겼다.


 머리를 질끈 묶고 모자를 쓸까 생각도 했지만 그건 하수나 하는 짓이다. 아무렴 패션 아이템이라고 해도 ‘잠입’이라면 실내나 좁은 구석에도 있어야 하고, 의심을 사지 말아야 하는데 눈을 가리는 모자를 쓴다는 건 정체를 들키고 싶어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오래 걸어야 하니까 신발은 가장 편안한 게 좋다. 바지는 검정색 냉장고 바지를 입었는데 너무 패션에 신경을 안 쓰는 건 싫어서 티셔츠는 로고가 크게 박힌 흰색 박스티를 골랐다. 컨셉은 누군가의 일터를 취재하기 위해 견학하는 대학생이다. 외적으로 아주 Perfect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못 먹는 점만 흠이다.     


 어느 날 개명을 하겠다고 한가득 주문 인쇄한 아빠의 명함 한 갑을 찾았다. 지금도 충분히 예쁜 이름인데 개운을 하겠다고 했던가. 유독 촌스러운 이름을 받아와서는 명함부터 사업자명까지 바꾸려는 대대적인 시도를 했더랬다. 그 일은 금방 허탕으로 돌아갔다. 작더라도 20년 이상 운영한 사업체의 대표인데다, 사람들이 그 이름을 많이 불러줘야 하는데 자꾸 헷갈려한다며 명함도 간판도 도로 되돌려놨다. 그래서 이 이름도 서랍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서랍을 다 뒤지고 나니 이번 프로젝트는 깨나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가출 청소년이라도 된 듯 팔짱을 끼고 집 안의 살림살이들을 주욱 훑어봤다. 한 번도 접은 적 없는 빨래건조대, 닦아도 닦아도 흰 얼룩이 지워지지 않는 싱크대, 이사 올 때부터 있었던 통돌이 세탁기... 모두 텅 비어 있어 해결하고 가야 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맛이 가버린 동태탕이 문제였다. 나는 음식물쓰레기 처리에는 소질이 없으므로 이런 경우에는 주로 냄비를 냉동실에 통째로 넣어두곤 했다. 냉동실 문을 여니 색색의 냄비들이 나를 반겼다. 어느 날 끓였던 콩나물국, 참치김치찌개, 아욱 된장국이 꽁꽁 얼어 있었다. 쉬어버린 찌개 전시 대회가 있다면 ‘Mia’라는 이름이 그 계기로 알려지는 최고의 불명예를 안을 수도 있다. 테트리스 하듯 냄비를 정리하고 동태탕을 냉동고 가장 안쪽에다 넣어두었다. 동태는 원래 얼려서 만들어서 동태인 거니까. 비록 여름밤 하루에 맛이 가버렸지만, 누구든 무엇이든 최후는 이름 대로 되었으면 했다.     


 지하철을 타고 아빠의 일터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상쾌했다. 용산은 굴다리 하나로 분위기가 확연하게 달라지는 곳이었다. 정확하게는 신용산과 용산의 차이다. 나는 먼저 신용산역에 내렸다. 신용산역 5번 출구가 굴다리라고 불리는 신용산 지하차도와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신용산의 낮은 활기차고 건강해 보였다. 큰 화장품 회사 건물 주위로 예쁜 카페와 맛집이 있었다. 마침 점심시간에 도착해서 길거리에 직장인도 많았는데, 다들 하나같이 비슷한 디자인의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있었다. 잠깐 요기하기 위해 들른 카페에서는 향기도 나지 않는 비누를 만 오천 원에 팔고 있었다. 그보다 비싼 베이글과 아이스티를 먹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은 여자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저기 굴다리만 건너면 서울 3대 케밥 가게 있다던데, 내일 가볼까?”

“노노노, 저기 건너편은 위험해”

“왜?”

“좀 험악한 사람들도 많고, 웬만해선 안 가는 게 좋던데? 남편도 별로 안 좋아하더라고?”

“하긴 뭔가 분위기가 칙칙하긴 해”     

 여자들의 대화에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가득한 한편 남자들의 대화에 등장하는 용산은 미묘하게 다른 불쾌감이 있었다.     


“굴다리 깨끗하게 다시 지었네?”

“크, 예전에 저기서 게임 CD 강매 많이 당했는데”

“오죽하면 최 팀장님도 어릴 때 저기서 CD로 삥 많이 뜯겼다던데”

“덩치 크고 말고 가리지도 않았지.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면 다 타겟 되는 거였음”

“그래도 최 팀장님 썰은 진짜 레전드”     


 이건 앞으로의 계획에 충분히 참고될 만한 내용이었다. 흥미로운 점심 식사 탐색을 마치고 마침내 굴다리 앞에 도착했다. 무성한 소문이 있는 것에 비해서는 꽤 쾌적한 컨디션이었다. 옛날의 용산 굴다리 이야기는 인터넷에서도 많이 본 적이 있으나 요새는 그런 문화도 사라진 듯하다. 굴다리는 아무리 걸어도 끝나지 않을 것처럼 직선으로 길게 뻗어 있어서 들어가기 두렵게 생겼지만 3분이면 금방 지나올 수 있었다.     


 카페에 있던 여자들의 호들갑이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굴다리 끝, 경사를 오를 때 보이는 첫 번째 풍경은 하늘이었다. 상가 건물이 상대적으로 낮아 맑은 하늘이 잘 보였다. 그 아래에는 못생긴 조형물이 보였다. 전봇대 사이에 간판처럼 달아둔 플라스틱 팻말에는 ‘통신의 명소, 전자타운’이라고 쓰여 있었다. 용산 전자상가 일대에는 대표적인 큰 상가가 5개 있다. 각 상가는 10동이 넘는 건물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하나의 큰 랜드마크 건물로 존재하기도 했다. 자세히 관찰해보지 않으면 헷갈리지만 각 상가는 각자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조명을 주로 다루는 곳이 있는 반면, 핸드폰 가게만 가득한 거리도 있다. 각 상가 사이사이에는 백반이나 돈가스를 파는 식당이 있고 드물게 노포 맛집이 있었다. 스마트 팜 따위를 들여와 신사업을 하는 가게도 보였는데 아쉽게도 내가 흥미를 느낄 만한 가게는 운영에 운명을 다한 듯했다. 항간에는 한 대규모 상가는 곧 폭파되고 그 자리에 호텔이 들어선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빠의 가게가 위치한 다인상가를 찾았다. 다인상가는 한 개의 건물이긴 한데 면적이 대단히 넓어서 출입구가 15개나 되었다. 건물 외벽은 한 번도 닦은 것 없는 것처럼 누리끼리한 색을 띠며 근처에는 택배 차량이나 캐리어(라고 불리는 무식한 크기의 구루마)를 끄는 사람들로 붐볐다. 이제 아빠의 가게로 가장 자연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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