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나 고메르 관장님의 강연에서 만난 이야기
이미지 출처: Fliker(@buskfyb)
내 방처럼 소파에 드러누워 편안히 책을 읽는 아이들
우리 집 부엌처럼 도서관 부엌에서 수프와 스무디를 만들어먹는 아이들
도서관 한편에서 드럼과 피아노 연주를 하고 다른 한 켠에서는 재봉틀질을 하는 아이들까지
전주시립도서관 트윈세대 공간 프로젝트를 하면서 노르웨이 비블로 퇴이엔, 스웨덴 티오 트레튼과 같은 사례를 만날 때마다 들었던 의문입니다. 무엇이 다를까, 어떻게, 왜 다를 수 있었을까를 항상 궁금해하던 차에, 스웨덴 쇠데르탈리에 지역 도서관을 이끄는 헬레나 고메르 관장님의 강연회가 국립 어린이 청소년 도서관에서 열린다는 첩보를 접했습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20년간 도서관 건립에 매진해온 헬레나 관장님의 강연을 들으니 사례로 찔끔(?!) 접할 땐 보이지 않았던 공통점이 보였습니다. 특히 어린이들을 위한 도서관 프로젝트를 소개해주셔서인지 더욱 와 닿았는데요. 그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0~9세 어린이 및 성인(가족)을 위한 도서관(Rum for barn; Room for Children)과 10~13세를 위한 도서관(Tio Tretton)의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Room For Children
Rum for barn(Room for Children) 도서관은 만 0~9세부터 가족(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도서관입니다. 모든 어린이들의 니즈를 고려한 공간을 만들고자 지금까지 끊임없이 리서치를 해오고 있는데요. 리서치에서 나온 시사점은 간단해 보이지만 핵심적입니다. 예를 들면 책 컬렉션은 '어린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배치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런 배치 방식은 아이들 누구든지 언제나 본인이 원하는 책을 직접 찾을 수 있는 공간이 되기 위해선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이란 의미가 연령대별로 다르기 때문에 0~2세, 3~6세, 7세 이상으로 나누어 타겟 그룹에 맞는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어린 0~2세의 공간에서 책은 읽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물(Object)입니다. 씹어도 되고 던져도 되는 물건이죠. 그래서 책을 특정 방식으로 배치하지 않고, 모든 책이 바닥에 놓일 수 있다고 상상합니다.
3~6세를 위한 공간은 아이들이 책장 사이를 편하게 오갈 수 있도록 안전한 계단을 만드는 일에서 출발합니다. 또한 그림이 책을 찾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어떤 내용에 대한 책인지를 그림 위주로 보여줍니다. 아이들에게 저자는 중요하지 않아요.
7~9세를 위한 공간에는 특이하게 아트 스튜디오가 있어요. 책을 읽기 전에 표지를 보거나 혹은 책을 읽다 보면 머릿속에 이미지로 떠오르는 것들이 있는데 그런 걸 그림으로 표현해볼 수 있는 공간이에요. 찰흙, 왁스, 철사 등으로 놀면서도 책과 친해질 수 있죠. 사실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공간은 손, 도구를 씻는 공간이에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연령대와 관계없이 헬레나 관장님이 강조하는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최대한 책의 앞면, 표지가 보이게 책을 배치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책을 표지로 배치한다는 팁이 어쩌면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림으로 책을 찾을 수 있다면 아이들이 누군가의 도움 없이, 본인이 찾고자 하는 책이든 몰랐던 책을 우연히 발견하든 스스로 할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책을 꽂는 디테일 하나에서도 느껴지는 철학, 아이들이 책을 찾아줘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책을 고를 수 있는 '작은 독자'라고 존중하는 철학이 스웨덴 도서관을 다르게 만드는 시작점이 아닐까요?
책의 그림, 표지가 보이게 배치하는 것과 일맥상통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몰랐던 책을 쉽게 만날 수 있도록 하려면 저자의 이름 순보다 책의 줄거리, 맥락을 기반으로 배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인데요. 예를 들면 해리포터 책을 배치할 때 H 순서로 두거나 J.K 롤링이란 저자 이름으로 놓는 것이 아니라, 해리포터 소품을 함께 두거나 모험, 판타지 등 이야기 맥락에 닿는 다른 책들과 함께 배치하면 책을 자연스레 집어 들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스웨덴 도서관에서는 아이들이 직접 책을 찾고, 자연스럽게 새로운 책을 발견할 수 있도록 환경 전반적인 요소에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물론 품이 더 많이 들 수도 있지만, 어린이의 시각에서 도서관 환경을 바라보고 주체적인 독자(Reader)로서 어린이를 바라보는 시각이 도서관 전체에 스며들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스웨덴 도서관에서는 '스태프의 개입을 줄이는 것(lose control)이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있다고 합니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방문객 누구나 직접 책을 찾고, 몰랐던 책을 우연히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나는 것, 방문객이 스스로 도서관의 경험을 만들어가는 여지를 주는 환경(make rooms for visitors)이 중요하다는 스웨덴 도서관의 철학을 느낄 수 있는 강연이었습니다.
Tio Tretton
스웨덴 도서관을 보면 우리나라 도서관이랑 특히나 더 다르다고 느껴지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큰 부엌에서 파스타를 만들어먹는 모습이죠. 왜 도서관에서 음식을 해 먹는 걸까? 저 또한 부엌이 색다르긴 하지만 굳이 부엌까지 필요한 걸까란 생각도 했습니다. 헬레나 관장님은 도서관에 부엌을 만든 의도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 생활에 항상 부엌이 있는 것처럼 왜 도서관에 부엌이 있으면 안 되나요? 집에 있는 부엌 테이블에 앉아 숙제를 하거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도서관에서도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면 자연스레 책 이야기로도 이어지지 않을까요?
스웨덴 도서관의 주요 컨셉은 책보다도 이야기, 스토리텔링이라고 합니다. 이야기라는 것은 꼭 책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부르다가, 영화를 보다가, 혹은 파스타를 만들면서도 나올 수 있습니다. 부엌에서는 모든 것이 의도한 대로 꼭 나오진 않지만 몰랐던 새로운 호기심을 느끼기 좋은 활동입니다. 음악을 만들거나 아트, 크래프트 작업 역시 마찬가지죠. 책과 관련 없어 보이는 활동이더라도 이야기가 만들어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책 외에 다양한 활동이 가득한 티오 트레튼(Tio Tretton)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활동은 의외로 책 읽기라고 합니다. 10~13세 친구들이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도 많고 생각도 많은 시기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10~13세 어린이들이 자신의 관점, 생각,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방문객인만큼, 탐험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책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책 읽기를 장려할 수 있는 활동. 그리고 이야기를 만나고 만드는 활동.
어떤 것들이 떠오르시나요?
Cooking is a way to create stories, experimenting flours and vegetables.
강연을 듣다 보니 스웨덴 도서관이 어떻게 다른지는 충분히 느껴졌습니다. 그런 만큼, 대체 왜 스웨덴 도서관은 이렇게 다를 수 있었을까가 궁금했지요. 제 마음에 답을 하듯 헬레나 관장님께서 강연의 시작부터 끝까지 '방문자, 즉 어린이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시각'을 강조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방문자 시각으로 현상을 바라볼 수 있는 3가지 질문을 소개해주셨습니다.
For whom, Why, What effect will be?
예를 들면 '책을 알파벳 순서로 배열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사결정의 경우, For whom?(누구를 위해서)이란 질문을 던져보면 이것이 방문객 혹은 어린이의 관점에서 좋은 것인지, 혹은 스태프들이 책을 찾기 쉬운 방식이어서인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책을 알파벳이 아니라 콘텐츠 중심으로, 책의 앞면을 보여주는 형태로 배치한다는 결정에 있어서 'What effect will be?(어떤 영향이 있을까)를 떠올리면 아이들이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본인이 집에서 책장에서 책을 집어 드는 것처럼 이용하게 될 것이란 생각까지 닿을 수 있죠. 이처럼 3가지 질문은 간단한 듯 보이지만 방문객의 시각에서 환경을 구축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스웨덴 도서관이 차이를 만들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다양성입니다. 여기서 다양성은 책, 자료의 다양성이라기보다, "책을 읽는 것이 항상 책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를 인정하는 열린 마음에서 시작하는 '가능성의 다양성'입니다. 누구든지 본인의 관심사에서 호기심을 일구어 나갈 수 있도록 다양한 속도와 여지를 존중하는 공간이라는 의미죠.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접근을 공감할 수 있는, 다양한 스킬로 도와줄 수 있는 스태프가 필요합니다.
One of my best knowledge is not to be a librarian. I can ask “why?”
헬레나 관장님은 사서 출신이 아닙니다. 영화 프로듀서, 공연 예술가로 활동하다가 도서관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인지 자신의 가장 큰 강점이 사서 출신이 아니라는 점이라고 합니다. 도서관에서 으레 일어나던 모든 것들에 대해 왜 그래야만 하는지 본질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죠. 사서는 물론, 드라마 작가, 요리사, 춤 선생님, 예술가, 사회복지사 등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어 고민하고 힘을 합친다면 우리는 어떤 도서관을 그려볼 수 있을까요? 아직 누구도 밟지 않은 드넓은 눈밭을 바라보듯, 누군가가 남기고 갈 여러 모양의 발자국이 기다려집니다.
마지막 Q&A 시간에 누군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초등학교에 차세대 도서관을 지으려 하는데 혹시 제언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답이 궁금한 질문이었지만 바로 답하기엔 거대한 질문이었기에 모두가 숨죽여 헬레나 관장님을 지켜봤습니다.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Make sure children can reach the books.
Divide books by context, not by our thinking of books.
Make environment suitable for children.
이에 덧붙여 책을 권위 있게 비치하기보다 손쉽게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공간 ("easy to find a book”)이 되도록 신경쓰고, 아이들이 책을 읽는 것에 대해 무엇이 좋았는지를 모여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가지라고 ("listen to children’s voice about reading and books.") 말했습니다. 가장 본질적인, 가장 핵심이지만 그래서 가장 잊기 쉬운 바로 그것이었죠.
외관에, 혁신성에, 차별화를 신경 쓰기 이전에 방문객의 관점에서 좋은 경험은 어떤 경험인지 본질을 놓치지 않는 것. 어떤 물리적 공간, 프로그램인지 보다 어떤 원칙을 가진 공간, 어떻게 접근하고 소통하는 공간이 될지를 일깨워주는 대답, 강연이어서 더욱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짧지만 깊이 있었던 강연의 내용을 되새기며, 씨프로그램에서 다양한 파트너들과 함께 만들어가고 있는 전주시립도서관에 생길 트윈세대 공간(12월 개관)에 조금씩 반영해나갈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
글: C Program Play Fund 김정민 매니저
아이들과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놀이터, 그리고 그 외의 다양한 제3의 공간과 놀이 소식을 전하는 뉴스레터가 매주 목요일 여러분의 메일함으로 찾아갑니다. 구독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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