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잘 노는 집 '실전'편: 그 집 아이들은 뭘 가지고 놀아요?
[아이와 가기 좋은 제3의 공간]에서는 김남매 엄마이자 리틀홈 CCO, 이나연 님이 직접 가보고 고른 다양한 공간을 소개합니다.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놀이터 중에서 익숙한 공간이지만 새롭게, 다르게 놀아볼 수 있는 공간이나 미술관 + 놀이터, 박물관 + 공원처럼 여러 공간이 결합되어 있어 아이들이 스스로 놀이 방법을 바꿔가며 다양하게 놀 수 있는 공간을 소개합니다.
‘아이가 잘 노는 집’을 읽으시고 우리 집을 보다 본격적인 놀이터로 만들어볼까 마음먹은 분들을 위해 보다 구체적인 팁을 준비했다.
그 집 애들은 뭘 가지고 놀아요?
놀이에도 소위 말하는 ‘장비빨’이라는 것이 있다.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을 때 맨 손으로 하는 것과 삽과 양동이를 가지고 하는 것이 천지차이이듯 아이들의 놀이를 더 흥미롭게, 발전적으로 나아가게 하는 아이템이 따로 있다.
그래서 대부분은 끊임없이 장난감을 구매한다. 아이가 원해서, 때론 원하기도 전에 이걸 사주면 조금 더 잘 놀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말이다. 그러나 내 경험상 장난감의 수와 가격이 놀이의 질과 시간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다른 놀이 장비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집놀이 장비란 다음의 네 가지 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구하기 쉽고 가격에 부담이 없는 것
둘째. 아이 혼자 다룰 수 있는 것
셋째,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는 것
넷째, 정리가 용이한 것
필수장비는 말 그대로 효과적인 집놀이를 위해 항상 구비되어 있어야 할 것들이다. 아이가 일을 벌이고픈 마음이 생겼을 때 즉각 행동으로 옮길 수 있도록, 이 장비들만큼은 떨어지지 않게 챙겨놓는다.
택배가 오면 우리 아이들은 내용물보다 박스가 배달 온 것에 더 즐거워하곤 했다. 그 날 배달 온 박스의 생김에 따라 놀이가 정해지곤 하니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미스터리 박스!
하지만 박스라고 다 같은 게 아니다. 흔하디 흔한 박스 중에서도 재질이 단단하고 표면이 매끄러운 것은 최상품이니 무조건 챙겨두어야 한다. 대체로 파손의 우려가 있는 전기제품이나 과일 등을 포장한 상자가 단단하여 쓰임이 많다. 아파트 단지에 냉장고라도 배달이 오는 날엔 꼭 기다려서 받아온다.
+ 휴지심, 키친타올심 등도 평소 생길 때마다 챙겨두면 요긴하다.
아이들이 어릴 땐 하루에도 몇 장씩 그림을 그려 대는 통에 스케치북이나 도화지를 사놓으면 금방 바닥나곤 했다. 아이들도 답답했는지 어느 날부터 A4용지를 가져다 그림을 그리고 만들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종이가 작고 얇아 다루기 수월하고 치우기도 간편해 애용하게 되었다. 이면지도 모아 놓으면 아이들이 자유롭게 찢거나 가위질을 할 수 있어 좋다. 외출할 때에도 챙기기 어려운 스케치북 대신 A4용지를 한 뭉치 들고나가면 유용하다.
아이들이 어릴 땐 여기저기 사고를 치는 통에 미술재료 꺼내 주는 게 어렵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선명하고 다양한 색을 통한 자극과 손을 움직이는 대로 그려지는 성취감은 유아기에 꼭 필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비교적 처리가 쉬운 재료를 선택한다면 미술놀이도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
아이가 처음 접하는 재료로 크레파스, 그중에서도 무르고 잘 닦이는 크레파스를 추천한다. 개인적으로는 아모스의 파스넷이 가격도 합리적이고 품질도 좋아 즐겨 쓴다. 일반 크레파스와 달리 많이 무르기 때문에 립스틱처럼 돌려서 사용하는 형태로 되어있어 손에 묻는 걸 싫어하는 아이와 부모에게도 부담이 없다. 힘을 조금만 들여 그어도 발색이 잘 되고, 종이뿐 아니라 유리나 섬유에도 잘 그려져 활용도가 좋다. 붓에 물을 묻혀 바르면 수채화 효과도 낼 수 있고 바닥에 묻어도 쉽게 닦여 안심이다.
+ 그림 재료에 조금 더 욕심을 내고 싶다면 문교의 오일파스텔을 추천한다. 보기엔 전공자들이나 쓸만한 재료처럼 느껴지지만 가격도 합리적이고 파스넷처럼 무른 재질이라 어린아이들이 쓰기에 좋다. 무엇보다 유아용 크레파스보다 색이 훨씬 다양하다.
비교적 처리가 쉬운 재료를 선택한다면 미술놀이도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
아이들은 이것저것 붙여서 만들어내기를 좋아하는데 생각보다 풀은 접착력이 약해 사용이 어렵다. 테이프가 있다면 훨씬 많은 것을 할 수 있는데 아이 혼자 테이프를 뜯는 것이 어려우므로 테이프 커터를 준비해주면 좋다. 물레방아라고도 부르는 이 커터기는 간단한 조작으로 테이프를 뜯을 수 있고, 손이 다칠 위험도 없어 어린아이들의 만들기 활동에 큰 도움을 준다. 물레방아 돌리는 재미도 만만치 않고 말이다.
마스킹 테이프는 종이 재질이라 가위가 없어도 손으로 쉽게 끊을 수 있어 아이들이 혼자 사용하기 좋은 재료다. 또 일반 테이프보다 접착력이 약해 자국 없이 떼고 붙일 수 있어 벽이나 마룻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나 기차를 좋아하는 아이라면 마스킹 테이프로 집 어디든 원하는 곳에 원하는 길이로 도로와 기찻길을 만들 수 있다. 놀이공간과 상상력을 확장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비다.
자동차나 기차를 좋아하는 아이라면 마스킹 테이프로 집 어디든 원하는 곳에 원하는 길이로 도로와 기찻길을 만들 수 있다. 놀이공간과 상상력을 확장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비다.
테이프로 붙이기 어려운 작은 아이템, 예를 들어 구슬이나 모래 같은 것을 붙이려면 목공용 본드가 제격이다. 무독성에 그립감이 좋은 제품도 여럿 있기 때문에 구비해놓으면 쓸모가 많다. 한때 우리 딸아이는 종이에 가득 구슬을 붙이며 몇 시간씩 놀곤 했다. 목공용 본드가 마르면 투명하게 변하는데, 그런 성질을 이용해 그림을 코팅하는 놀이도 할 수 있다.
가위는 욕심을 좀 부려야 한다. 자주 쓰기 때문에 집 안에서도 종종 잃어버리게 되고 용도와 사용자의 연령에 따라 가위의 크기, 날의 날카로움 정도가 달라져야 하기 때문에 어린이용 작은 가위, 큰 가위, 천도 자를 수 있는 날카로운 가위, 나뭇가지를 자를 수 있는 전지 가위 등 아이의 성장과 필요에 따라 넉넉하게 비치해 놓으면 좋다.
위험하다고 여기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나의 경험에 의하면 아이들은 조심스레 도구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위험한 도구일수록 제대로 사용했을 때의 성취감이 더 크다.
아이들이 집에서 작업을 시작했다면, 그래서 엄마도 마음의 준비가 좀 되었다면 물감 사용에 도전해볼 만하다. 어린아이들의 물감 사용이란 ‘그림을 그리는 것’ 보다 ‘색을 칠하는 것’에 가깝다. 물을 조절하여 사용하는 것은 훨씬 고급 스킬이고 그저 물감을 짜서 그대로 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이에 맞는 물감을 구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아용 물감은 튜브가 아닌 통에 담긴, 대용량을 구입하는 것이 좋다. 일반 물감보다 묽은 제형이라 따로 물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며 원 없이 물감을 짜서 써도 양에 부족함이 없다. 아이들은 물감을 사용해 작고 정교하게 그리는 것이 어려우므로 큰 종이나 박스를 칠하는 활동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종이박스 위에 물감을 한번 칠해서 말리면 박스가 한층 단단해지는 효과도 있다. 놀이 시간이 길어지는 것은 덤이고 말이다.
햇반통을 잘 씻어 말려 모아두면 팔레트로 사용할 수 있다. 크기가 적당해서 통 하나에 물감을 한 색깔씩 짜면 아이가 손에 들고 이동하면서도 쓸 수 있고, 옴폭한 형태라 밖으로 물감이 흐를 위험도 적다. 작업 후엔 물감을 씻어내기도 좋고, 어렵다면 통째로 버리면 되니 뒤처리도 간편하다.
놀이를 위해 사용할 붓이라면 가는 것보단 넓고 평평하여 넓은 면적을 칠하기 좋은 것, 가격이 저렴하여 뒤처리가 어려울 경우 서슴없이 버릴 수 있는 것으로 고르는 것이 좋다. 아이들은 붓을 깨끗이 빨아 쓰는 것이 어려우므로 수량을 넉넉히 준비해 색마다 다른 붓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좋다.
글루건은 열을 가해 실리콘을 녹이는 장비이기 때문에 사용 시 많은 주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풀이나 테이프로는 역부족인 두꺼운 상자, 나무, 플라스틱, 금속까지도 붙일 수 있기 때문에 잘 사용한다면 놀이의 지경을 상당히 넓힐 수 있는 마성의 장비다. 염려가 된다면 보호자가 지켜보는 경우에만 사용하도록 약속을 하거나 작업용 장갑을 끼고 사용하게 하면 된다.
집마다 하나씩은 있는 크리스마스 전구. 겨울철에만 꺼내어 쓸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놀이도구로 이용해보시길 추천한다. 아이들은 들어가 숨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때 크리스마스 전구가 쉽고도 안전하며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조명기구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그저 빈 상자 일 뿐인데 크리스마스 전구를 테이프로 툭툭 둘러 고정해주는 것 만으로 금방 근사해진다.
하나씩 챙기다 보면 놀이 장비의 양과 종류가 만만치 않다. 그래서 고민하다 준비한 것이 재료 수레. 아이 어릴 적 기저귀 수납함으로 쓰던 3단 트롤리를 재료를 수납하는 곳으로 용도 변경했다. 바퀴가 달려있어 어디든 끌고 다닐 수 있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재료들을 수레에 담기만 하면 되니 정리도 수월해 일석이조다. 꼭 수레가 아니더라도 아이가 원할 때 쉽게 꺼내어 이용할 수 있도록 큰 통이나 바구니에 장비들을 한데 모아 담아 놓으면 좋다.
재료 수레가 있어 가장 좋은 점은 아이들이 집안 어디서든 놀이를 시작할 수 있고, 그래서 집 전체가 놀이 공간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르게 말하면 집 전체가 (아이방, 또는 엄마가 허용한 공간을 넘어) 어지럽혀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 집 남매는 그야말로 역대급 어지르기의 달인인데 매일매일 거실 전체에 장난감을 늘어놓고, 물감과 크레파스 등 온갖 미술재료를 끄집어내고, 천지에 종이를 오려 놓았다. SNS에 자랑스레 그 광경을 공유할 때면 청소와 정리에 관한 염려가 줄줄이 달렸다.
나 역시 폭탄 맞은 것 같은 집은 달갑지 않다. 그러나 어질러야만 가능한 놀이의 연속성과 확장성 역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고민했다. 쉽게 어지를 수 있으면서, 쉽게 치울 수 있는 수납과 정돈에 관해.
우리 집에서의 정리란 ‘공간을 깔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음 놀이를 위해 제자리에 두는 것’이다.
어른도 치우는 것이 귀찮아 일을 벌이지 않게 되는데, 어린아이들에게 지나치게 정돈을 강조하면 놀이 자체가 위축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제자리에 두지 않으면 필요할 때 찾을 수 없다는 경험을 통해 아이들 스스로 정돈의 필요성을 배우길 바랬다. 그래서 오랜 시간을 들여 우리 가족만의 정리정돈 룰을 만들어갔다.
예를 들어 자잘하고 자주 쓰이는 것들은 재료 수레에 정리하고, 물감은 캐비닛 안에 보관하고, 현재 작업 중이거나 더 가지고 놀고 싶은 것은 나무집에 올려둔다. 한번 정한 룰은 쉽게 바꾸지 않기 때문에 누가 치우든 깔끔하고 체계적인 정리가 가능하다.
그 덕에 아이들은 엄마의 도움 없이 필요한 재료를 찾을 수 있고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작업을 시작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장비가 있어도 쓰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모든 장비는 아이의 손이 잘 닿는 곳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어떠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당황하지 말아야 한다. 아이들이 집을 많이 어지를수록, 엉뚱한 사고를 칠수록 내가 챙겨둔 장비와 정돈의 룰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다. 동시에 내 아이의 머릿속엔 무지개와 은하수가 펼쳐지고 있으리라. 잘 노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에게 필요한 건 인내와 관대함이다.
아이들이 집을 많이 어지를수록, 엉뚱한 사고를 칠수록 내가 챙겨둔 장비와 정돈의 룰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다. 동시에 내 아이의 머릿속엔 무지개와 은하수가 펼쳐지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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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리틀홈 CCO 이나연님
편집: C Program Play Fund 김정민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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