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크게 인기를 끈 웹툰 ‘미생’에서 등장인물 중 한 명이 현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한 대사다. 물론 이전에도 ‘문제 해결의 답은 항상 현장에 있다’고 수많은 경영자들도 한 목소리로 강조했다. 그만큼 현장은 중요하다. 이제까지 얘기한 내용이 교과서적일 수도 있고 현장과 동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 대체적으로 현장의 영업 직원들은 “그렇게 말로만 떠들지 말고 네가 직접 해봐?” “그게 아니라고" "영업이 뭔지도 모르면서”라고 현장의 목소리를 드높인다.
영업 외 다른 부서, 특히 마케팅도 현장을 알아야 한다는 데는 100% 동감한다. 이는 현장에서 뛰고 굴러봐야 한다는 전통적인 의미의 노가다가 아니라 고객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여과 없이 듣는다는데 의의가 있다. 더욱이 펜데믹으로 인한 비대면의 확대, 전통적인 영업활동의 제한으로 고객과의 접접이 많이 줄었기 때문에 마케팅이 선두에서 서서 IT, 온라인의 힘을 통해 새로운 방식을 가이드하고 힘을 합쳐야만 한다.
지금부터의 스토리는 P사의 클라우드 서비스 실제 영업 현장의 사례를 인터뷰 후 어떤 문제가 있었고 어떻게 현장에서 답을 찾는 과정을 조금의 각색을 더해 구성했다.
먼저 구축된 브랜드는 강력한 진입장벽을 이룬다. 클라우드 컴퓨팅 시장에서 전 세계 시장점유율로 1위(약 30% 이상)인 AWS(아마존 웹서비스)는 우리나라에서는 90% 이상을 독점하고 있다. 발 빠른 시장 진입으로 글로벌 유수기업을 고객으로 영입 후, 안정성과 기술적인 호환, 브랜드 파워를 통해 국내에서도 삼성, LG, 현대 등 대기업뿐만 아니라 많은 중소기업과도 거래를 하고 있다.
P사의 클라우드 컴퓨팅은 이런 거대 공룡에 맞서 싸우기 위해 AWS와 MS의 기술진과 영업사원들을 대거 스카우트하고 경쟁사가 갖지 못하는 국내 규제에 맞춘 공공서비스 보안 기술을 내세워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영업사원들이 이직하면서 기존의 고객들을 일부 끌어오고, 공공서비스부터, 의료, 금융분야까지 한국시장에 특화된 보안과 품질로 공격적인 외부 영업 없이도 빠르게 사업을 키웠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 성장이 제자리에 머물고 신규 고객 창출도 눈에 띄게 감소하다 보니 회사는 마케팅을 통한 영업기회 창출과 지속성장을 위해 B2B 마케팅 전문가 S팀장을 영입한다.
유능한 S팀장은 빠른 시간에 회사에 적응해 가면서 마케팅 조직 세팅, LEAD수집을 위한 홈페이지 업그레이드, 검색광고 진행, 컨택센터 세팅, CRM 솔루션 보완 등 LEAD Generation부터 Nurturing까지 교과서대로 B2B 마케팅의 프로세스를 구축했다. 다들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저게 효과가 있나?" 하며 반신반의했지만, 예상보다 빨리 많은 수의 LEAD를 수집해, 그중 거래 확률이 높은 MQL을 영업팀에 전달할 수 있었다.
쉽진 않았지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순조롭게 흘러왔는데, 이상하게 MQL(Marketing Qualified Lead)이 계약 성공(Deal)으로 이어지는 건수가 너무 적었다. 보통 IT 업계 평균이 5% 정도인데, 여기는 1%, 즉 100건의 MQL을 전달하면 1건만 계약으로 이어지는 전환율이 너무 낮았다.
이상하다. 분명 needs가 있어 우리에게 먼저 컨택했고, 미팅 시 제안과 설명에 "모두들 좋아했다"라고 미팅록에 쓰여있었다. 다른 경쟁사와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도 없다. 답답하다.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S팀장은 영업팀에 요청해 실제 고객 설명회에 직접 따라가 보기로 했다.
오늘 만나는 고객은 국내 TOP 10안에 드는 K병원의 과장급 이상의 저명한 교수님들로 병원에서의 직급 피라미드 상 최고 정점, 일반 회사로 따지면 임원들, 즉 최고 결정권자들이다.
(실제 병원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조직의 위계가 강하고, 상하관계가 상당하다고 한다)
즉 대단히 중요한 고객들이고, 엄청 바쁘신 분들이시지만 또 이런 분들일수록 다양한 지식에 대한 궁금증이 많아 매달 첫째 주 월요일 1시간씩 업계 트렌드나 최신 정보 습득을 위해 외부강사를 초청해 세미나를 연다.
최근 트렌드인 "의료법 및 개인정보 보안 강화"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준비하는 직원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직접 홈페이지로 컨택해 요청한 건이다.
예선전 없이 한방에 결승전, 즉 최고 결정권자들과의 미팅으로 잘만 하면 정말 큰 거래로 이어질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교육, 의료 쪽을 담당하는 영업 3팀에서는 가장 실력 있는 김 과장을 선수로 링에 올렸고, 해당 팀장과 S팀장이 함께 배석했다. 몇 번이나 연습한 PT지만 김 과장은 시작 30분 전에 도착해 계속해서 리허설 중이다. 세미나실에는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오늘따라 무거운 공기와 섞여 긴장감을 더한다. 속속 "저 의사입니다"를 알려주는 흰색 의사 가운을 입은 청중들이 입장하고 누가 봐도 가장 높아 보이는 병원장님까지 않은 후, 행정직원의 짧은 소개와 함께 PT가 시작된다.
무심한 듯 익숙한 무표정속에 마치 환자를 보는 듯한 예리한 의사들의 눈빛, 처음엔 그렇게 시작했으나 PT가 진행될수록 고객들의 표정이 대체적으로 좋지가 않다.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거냐?" "화면 속에 집중이 안된다." "어디에 눈을 둬야 하는 거냐?", "EMR? VPN? NAS? DR 서비스? 난생처음 보는 단어들로 된 유식한 워드들은 좋은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PT의 반이 넘어갈 즈음 S팀장은 이미 마음속으로 확신했다. "아! 이래서 안 되는 거였구나."
한 장표 안에 읽기 어려운 크기의 폰트로 쓰인 수많은 텍스트, 여러 장표를 끼어 맞추다 보니 일관되지 않은 형식, 의도하지는 앉았지만 설명할수록 더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들, 강약 없이 단조로운 발표자의 목소리,
특히, 청중에 대한 눈높이 분석이 하나도 이뤄지지 않은 채 일방적인 내 이야기 전달만을 지금까지 해왔으니... 어찌 보면 1%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기술영업과 엔지니어들이 전체 회사 구성의 80%를 차지하고, 외부 영업이 필요 없이 회사는 성장을 해왔다. 당연히 외부의 일반적인 고객들을 만나 영업해야 하는 기회가 거의 없다 보니, PT자료 준비부터 스킬에 대한 트레이닝 역시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P사뿐만 아니라 내가 다녔던 그리고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도 이런 비슷한 일이 비일비재하게 있었고, 지금도 현장에서 왕왕 일어나고 있다.
효과적인 PT, 대면 커뮤니케이션 스킬 등에 대해서는 구글링만 해도 수많은 좋은 글들이 나올 테니, 여기서 따로 논하지는 않겠지만, 개인적인 경험으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同床同夢(동상동몽)' 즉 "같은 공간에서 함께 소통하며 같은 생각하기"를 강조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대개 '同床異夢(동상이몽)'이다. 고객 대상 프레젠테이션 현장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회의, 간단한 담소에서도 동상이몽은 왕왕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바다를 얘기할 때 어떤 이는 서해바다를 어떤 이는 제주도 앞바다를 떠올리고, 알파벳을 얘기할 때 어떤 이는 ABC를 생각하지만 어떤 이는 구글(알파벳이 지주회사)을 떠올린다.
그렇기 때문에 고객과의 모든 접점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은 쉽고 간단하면서 이해하기 쉬워야 하고, 특히 영업현장의 PT는 청중과 함께 소통하며 발표자의 의도대로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스킬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그 스킬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고객의 눈높이에 맞춘 발표자료 준비부터 대본 연습, 예상되는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 공간과 상황에 맞는 톤 앤 매너까지 준비와 연습에 끝이 없다.
그래도 여기 배울 수 있는 생생한 교본이 있어 다행이다. 프레젠테이션의 역사는 잡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따라 하기를 양산한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 프레젠테이션을 10번 이상 곱씹어 보자. 1,2번 봤을 때와는 또 다른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