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가 코앞이라 언니와 옷장 정리를 했다. 이십 년도 더 전에 즐겨 입던 미니스커트며 통 큰 바지 나팔바지를 번갈아 입어보며 낄낄댔다. 이걸 어떻게 입고 다녔지 미쳤다 소리를 열 번도 더 했다.
언니가 갑자기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빨간 봉투의 손바닥 반 만한 엽서다. 언니는 놀리는 표정이고 나는 어리둥절하며 그걸 열어본다. 카드는 언제 적인지 몰라도 그때 그대로 인 것 같다. 꽃 몇 송이가 촌스럽게 그려져 있다.
보고 싶다는 말, 오늘 연락이 안 와 불안하다고, 어제 내가 혹시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걱정이라고, 얼른 꼭 안아주고 싶다며 사랑해를 여러 번 덧붙이고 익숙하지 않은 자의 비뚤어진 하트가 그려진 글을 읽고 괜히 얼굴이 빨개진다. 그건 너무 유치했다. 나는 키득키득 웃고 언니는 큰 소리로 웃는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나에게 썼다는 것은 To 하고 내 이름이 있으니 알겠는데 From이 없다. 공간 배치에 실패한 건 아닌 게, '천재의 악필을 알아볼 수 있으려나.'라고 추신은 또 쓰여있다. 누구의 글씨일까. 대충 세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십 년에서 십 년 전까지, 그러니까 내가 의욕적으로 연애 활동을 하던 시절의 젊고 씩씩했던 그 얼굴들. 모두의 글씨를 잘 알았을 텐데도 그걸 기억하지는 못하다니. 그렇게 좋다고 사귀어 놓고. 어쩐지 내가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천재의 악필. 그 천재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갑자기 몹시 아득해진다.
언니가 "버려? 가져?"라고 물어 뭐라고 당장 대답은 못하고 도로 봉투에 넣었다. 딱히 챙길 이유도 없는 것 같아 "버리지 뭐."라고 답했다. 언니가 친히 가져가 쓰레기통에 넣고 뚜껑을 탕 닫는다.
카드는 사라졌는데도 나는 계속 그것을 떠올린다. 누구였을까. 누가 그렇게 단 하루의 연락 두절에도 그리움에 손편지를 적어 주었을까. 쑥스러운 듯 그저 말하듯이, 어서 이 말이라도 여기에 해놓아야 동동거리는 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다는 듯이, 어린 사랑의 말들을 적어주었을까. 생각할수록 쓰레기통에 들어간 카드가 눈앞에 다시 보이는 것 같다. 너무 답답하니 속이 좀 울렁거린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뭔가 잘못한 일인 것처럼 마음이 불편하다.
추려낸 셋과의 꼬깃꼬깃한 기억들을 좀 꺼내본다. 그게 누구인지만 알아도, 그와의 끝이 얼마나 별거 없이 별로였는지,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얼마나 흥청망청 탕진하고 탈탈 비운 뒤 무심하게 헤어졌는지, 모두 떠올릴 수 있게 되어 이 미안한 마음은 사라질 것 같은데.
천재의 악필, 이라고 덧붙인 그가 누군지 도저히 모르는 채 나는 계속 뒤척인다. 그러나 내가 알든 모르든 아무 상관도 없이 멀거나 가까운 곳 어딘가에서 그는 곤히도 잠들었겠지 생각하니 나도 깊이 생각할 일이 아니다. 침대는 작은데 세상은 갑자기 너무 넓고 너무 조용하다. 이런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들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큰 일들은 작아지고 작은 일들은 없어진다.
어떤 날에 엄청나게 다급히 솟구치던 마음은 카드에 몇 줄의 글씨를 남기고 흔적도 없이, 전혀 없이, 사라졌다. 사라진 사실조차 모르고 시간이 간다. 사라짐의 한참 뒤에 불현듯 내가 있다.
잊혀진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나는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