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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ro Nov 15. 2021

혹시 몰라, 첫눈

아침에 언니가 보낸 카톡에 잠이 깼다.

[밤새 눈이 펑펑 내렸어! ]

메시지를 보자 눈이 반짝 열렸다.

서둘러 창 커튼을 들춰보았더니 이게 뭐야, 눈은 다 녹고 그저 젖은 풍경이다. 내려다보이는 옆 건물 옥상에만 하얀 카펫 같은 눈이 한 겹 남아 있다.

[다 녹았네 ㅜㅜ 첫눈인데 ㅜ]

답장을 하고, 그래도 소식을 하려 아이에게 갔다.

 그래도 잠이 많은 아이는 날이 추워지면서 아침마다  일어나기 힘들어했는데, 첫눈 왔어~라는 말에는 이미 깨어 있었던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재빠르게 거실로 나가 창밖을 한참 둘러보는 아이에게 거짓말  사람처럼 괜히 미안해져 근데  녹아버렸나 ,  봐서 아쉽다, 그치. 라고 달래며 말했다.


그런데 아이가 돌아서서 나를 보며 씨익 웃는다. 무엇인가 신나는 비밀을 가진 얼굴이다. 손가락을  피더니 내민다.  엄마,  봉숭아  아직 남았어!라고 말하며 아직도 엄지손톱 끝에 크레파스 자국처럼 붉게 남은 것을 보여준다.


나는 잠시 눈이 동그래졌다가   소리로 었다.  애는 봉숭아 물을 들이던 여름날부터 정말로 첫눈이 오는 날까지 물든 것이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지느냐고 종종 묻고는 했다. 나는 대충 그렇다고 말하면서도 손톱을 깎아줄 때면, 그때까지는 남아있지 않을  같은데,라고 중얼대었는데, 그럴 때마다  애는 혹시 몰라, 혹시 몰라, 했다. 그런데 정말 혹시 모르는 일이 일어나 버린 것이다. 지난주에도 따뜻하더니 하루아침에 겨울 추위가 급기야 눈이 내리다니.


아이는 평소 같은 아침의 게으름을 찾아볼 수도 없이 눈을 반짝이며 가벼운 몸짓으로,

따뜻한 수프를 먹고 흥겨운 양치를 하고 머스터드색 니트를 입고 목도리를 두르며 집을 나선다. 슬쩍 물어도 그토록 첫눈을 기다리게 만든 짝사랑의 존재에 대해서는 얄궂은 표정만 지을 뿐 말해주지 않는다.


생각하는 것은 생각할 때마다 가까이 온다.

기다리는 것은 이미 도착해 있다.

그런 문장들을 읽었던  같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원할 때마다 실감할 수 있다.

간절하게 그려보던 것은 가끔 진짜처럼 보이고는 한다. 그리운 사람의 얼굴을 그리는 일이 그렇다. 아이는 첫눈이  것을 기대하며 펑펑 쏟아지는 눈을  번이나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막상 그것이 모두 사라졌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첫눈이 틀림없이 왔다는 것이 중요하니까.


첫사랑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얻은 자의 만족스러운 얼굴로 발목에 풍선을 달고 아이는 초겨울의 거리를 가로지나 학교에 간다. 나는 뒷모습에 손을 흔들고 집으로 돌아와 이제는 반도 남지 않은 건너편 옥상의 남은 눈을 본다. 아이와 함께 물들였던  손톱은 오래전에 붉은 자국을 모두 잘라냈지만 괜히 한번 손톱 끝을 살펴본다.


그동안 잘려나간 다홍빛의 얇은 손톱 조각들, 완전히 잊어버린 첫사랑의 얼굴,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함께 남지는 않았을 그때 마음, 마음이 남았다고 해도    없이 흘러간 시간, 그런 것들을 생각하다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사람에게 ‘첫사랑이라는 이름을 지어달았을까 궁금해진다. 어디가 무엇이 그토록 좋아서  한번뿐인  이름을 거기에 매달았을까.


네가 나를 불러주어서 나는 꽃이 되었다는 오래전 시와, 그런데 부름 받은 내가 만약 꽃이 되고 싶지 않으면 어쩌지?라고 말하던 산문과 네가 나를 불러주어서 나는 그 이름에 어울리는 내가 되어야 했다는 또 다른 시구도 생각났다. 내 첫사랑이라고 불리던 사람은 그중 어떤 마음이었을까. 내가 달아준 이름에 걸맞고 싶었는지, 나에게로 당장 와 꽃이 되고 싶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아직도 내가 그 이름을 달아주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지.


기억은 시간을 애써 따라가다가 손가락 사이로 조금씩 빠져나간다. 다시 쥐어보려고 했을 때는 이미 오해와 착각을 덧입었다. 사라진 이야기에는 주인이 없으므로 환상적으로  마음대로 생각해버릴  있다. 아마도 나의 첫사랑은 봉숭아 물든 손톱으로 첫눈을 맞이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만큼 먼저  있는 걸음, 이미 도착한 대답과 같았을 것이라고. 뒤늦게 기억을 매듭짓는다.


건너편 옥상의 눈도 이제 완전히 녹았다. 하얀 자국 하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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