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의 개인주의(1) : 내 주변의 것보다 나에게 먼저 집중하는 것
스웨덴 사람들은 내 배경에 대해 먼저 물어보지 않는다.
지나치게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스웨덴의 개인주의(individualism) : 어떤 사람 혹은 어떤 집단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닌 내 개인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반대말로는 집단주의(collectivism)가 있다.
보통 서구권 문화는 개인주의, 아시아권 문화는 집단주의인 경우가 많다.
"고향이 어디세요?"
"어느 대학 나오셨어요?"
"지금 어느 동네 사세요? 자가예요?"
"남편(와이프)은 뭐 하세요?"
"애는 몇 명이예요? 몇 살이에요?"
어딘가 정말 익숙한, 살면서 가장 많이 들어 본 질문.
한국에서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모두가 한 번은 거쳐야 할 질문들. 아무 생각 없이 어쩔 땐 할 말이 없어서, 어쩔 땐 관심의 표현으로 하는 말이지만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도 있는 말.
살면서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이었지만, 이곳에 와서 가장 먼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깨달은 것.
나의 고정관념.
스웨덴에 와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나이도, 하는 일도 관심사도 다양했다.
처음으로 내가 맺은 인간관계는 영어와 스웨덴어 교실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내가 처음 들어간 영어 클래스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있었다. 일본, 터키, 브라질, 소말리아... 그중 세 명의 스웨덴 사람들이 있었는데, 모두 50, 60대 아주머니 아저씨들이었다. 이곳에 이민을 와서 '살기 위해' 영어를 배우는 우리와 달리, 그들은 그저 취미로 영어를 배우고자 했다.
처음에 나는 의아했다.
'저들은 도대체 은퇴하고 그냥 편안하게 여행이나 다니면서 살 나이에 어려운 영어 공부를 다시 하려는 걸까'
"한국에서 왔다고?"
"요즘에 나도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아. 오징어 게임도 봤어. 정말 재밌더라."
"스웨덴에 온 걸 환영해. 스웨덴 생활에 만족하고 있니?"
그들은 정말 친절하고 따뜻했다.
나에게 물어보는 하나하나의 질문에 예의 있었고, 나를 배려해 주는 느낌이었다. 그들은 단 한 번도 내가 먼저 말하기 전에 이곳에 누구와 같이 사는지, 남편이 무슨 일 하는지, 아이는 있는지, 한국에서는 무슨 일을 했는지 등 내 배경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보지 않았다.
또한 그들도 누군가가 물어보기 전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혹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은퇴 후 세계 여행을 다니고 싶어서 영어를 배운다고 했다. 여행을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문화를 배우려면 영어가 꼭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서로의 공통점 하나 '영어 공부'로 친구가 되었다. 대화 주제는 항상 영어 공부, 여행, 서로 다른 문화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 사이에 그것 외 다른 배경 설명은 필요 없었다.
나는 이곳에서 스웨덴 사람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처음에 학생들은 대부분 한국 드라마와 케이팝 등 한국 문화가 좋아서 호기심으로 발을 들였다가 생각보다 너무 어려운 한국어에 깜짝 놀라곤 한다.
한국어를 배우러 오는 학생들의 연령은 참 다양하다. 물론 한국인 여자친구 혹은 삼보(sambo : '동거인'의 스웨덴어) 때문에 한국어를 배우는 젊은 사람들도 있지만, 한국 드라마나 한국 아이돌이 좋아 한국어를 배우는 50, 60대 중년의 아주머니들이 참 많다.
처음에 나는 이게 참 이상했다.
보통은 그 나잇대 한국의 아주머니들은 가족과 집안일에 집중한다. 남편과 애 뒷바라지 하느라 내 취미 생활을 즐길 시간과 에너지는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그들도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이혼을 해서 싱글이라 시간의 여유가 많아 한국 문화를 즐기고, 퇴근 후 한국어를 배우러 오는 줄 알았다. 심지어 수업이 끝나고 함께 맥주 한 잔 하거나 간단한 저녁 식사를 즐기는 시간이 있어도 빼놓지 않고 항상 참석했다.
"내 아들 여자친구도 요즘 김치 만들기가 취미이라고 해. 그래서 우리는 만나면 얘기가 잘 통해."
"우리 남편도 내가 한국어 공부하는 동안 자전거를 타고 취미 활동을 하지. 우리는 항상 모든 시간을 함께하지는 않아."
오랜 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들은 모두 남편도, 자식도 있었다. 직장도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들의 가족, 일일 뿐이지 그녀 '자아의 일부분'은 아니었다.
그들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배우고 즐기고 있었다.
나는 언어에 그 나라의 문화가 참 많이 담겨있다고 생각하고, 이것은 내가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더 절실히 느끼고 있다. 그래서인지 한국어에는 나보다 '우리' 혹은 '내가 속한 집단'을 표현하는 단어가 많다.
스웨덴 사람들은 my wife와 my husband를 '우리 아내, 와이프', '우리 남편'이라고 하는 것에 매우 놀란다.
"우리 모두와 함께 내 남편을 공유한다는 말이야?"
"모두가 우리 엄마라고 말하면 누구의 엄마인 줄 어떻게 구분해?"
또한 회사를 다니다, 학교를 다니다, 교회를 다니다 처럼 '다니다'의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럼 가다와 다니다의 차이는 뭐지(영어와 스웨덴어로는 그냥 go / gå)?"
"만약 내가 남자 친구집에 매주 정기적으로 간다면, 그것도 남자 친구 집에 다니다 인 거야?"
게다가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름을 부르지 않으며, 대부분 회사에는 대리님, 부장님, 이사님처럼 수많은 직급이 있다는 것을 의아해한다.
"나는 이 포지션들이 정확히 어떻게 다른지 이해가 안 돼."
"왜 이름을 놔두고 직급으로 부르는 거지?"
정말 그랬다.
모두가 나에게는 익숙한 말들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는 어떤 집단에 속하자마자 내 고유의 것은 없어지고 '그 집단 내에서의 나의 위치'만 남는다.
마치 이름이 없어지며, 그냥 한 개인으로써의 나는 버리고, 너에게 주어진 타이틀에 집중하며 우리 사회의 일부분이 되라는 듯이.
내가 이때까지 만난 스웨덴 친구들은 나의 배경, 내가 가진 것, 주변의 사람들, 내가 자라 온 환경 등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물론 많이 많이 친해진 후에는 서서히 하나씩 자연스럽게 알아갈 수 있지만, 적어도 처음부터 마치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자기 소개하듯이 내 배경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 배경들이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는데 별로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그저 내가 파란색을 좋아하는 것처럼, 내가 가을이라는 계절을 좋아하는 것처럼, 나를 둘러싼 수많은 정보들 중 하나 일뿐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나를 둘러싼 환경, 즉 나의 가족, 직장, 사는 지역, 출신 학교 심지어 내 남편이 어떤 학교를 나왔고 어떤 직장에 다니고 있는지, 연봉은 얼마인지, 그리고 내 자식이 무슨 학교를 다니는지, 성적이 어떤지, 결혼은 했는지, 누구와 했는지(왜 남의 집 사위, 며느리까지 궁금해하는지 이해가 안 가지만)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설명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 배경이 이렇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저 사람들보다 조건이 좋지 않은데 나를 무시하면 어떡하지?'
'아, 저 그룹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게 이 정도는 돼야 할 것 같네'
같은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런 문화는 내가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할 때 나를 우울하게 만들고 때로는 외롭게 만드는 한 가지 요소였던 것 같다.
우리는 우리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 항상 나를 맞춰야 한다. 그리고 그 틀 안에서 평가한다.
하지만 스웨덴 사회는 그런 틀도 없을 뿐 아니라, 틀을 따르려 하지도 않고, 필요성도 없다.
이런 차이는 대부분의 서구권 나라에서 느끼겠지만, 특히 스웨덴은 그들의 삶의 철학 '라곰'과 합쳐져 이 특징이 더 두드러진다.
나의 개인적 삶과 내가 속한 가족, 직장, 국가 등 커뮤니티 사이에서 밸런스를 찾는 것. 그리고 그 밸런스를 위해서는 어떤 그룹 속에서의 나의 위치가 나를 정의하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진 개인적 가치관과 내 개인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나는 이것이 라곰을 바탕으로 한 스웨덴의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의 개인주의 문화가 백이면 백 모두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집단주의는 여러 면에서 편리하고 효율적이다.
하지만 또한 분명한 건 그들은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무엇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고,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까?
나는 지금 적어도 나를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위해 나의 배경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인생의 과업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나는 그냥 유니크한 존재,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