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래 Mar 29. 2021

아이들 손으로 꾸민 한국어 학급의 시작

한국어 학급의 일상

  세상 어디에 ‘시작’만큼 활력 넘치는 단어가 있을까? 가슴을 뛰게 하고 몸을 일으켜 세우는 단어다. 달력의 시작은 1월 1일이지만 학교의 시작은 다르다. 학교의 시작은 3월이다. 시기는 다르지만, 학교의 시작 역시 일 년 중 가장 에너지로 가득하다. 그리고 에너지로 가득하다는 것은 3월에 학교는 매우 바쁘다는 의미다. 


  3월, 선생님들은 정말 많은 일을 한다. 큰일부터 작은 일까지 다양하게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이 앞으로 일 년의 방향을 잡는 일이라 중요하지 않은 일이 없다. 그중 개인적으로 가장 의미 있는 일은 교실 꾸미기라고 생각한다. 선생님들 사이에선 ‘환경정리’라는 용어로 익숙하다. 


  교실 청소하고 정리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할 수 있겠지만 ‘깨진 유리창 이론’처럼 사소한 환경이 주는 힘은 매우 크다. 더욱이 자극을 온전히 받아 자기 것으로 만들며, 날로 발달하는 학생들에게 환경의 힘은 더욱 크다. 환경은 친구, 선생님과의 심리적 환경뿐 아니라 책상, 교실 게시판 등의 물리적 환경을 포함한다. 인간관계와 같은 심리적 환경은 교사의 의도대로 만들어 가기 쉽지 않고 큰 수고와 오랜 시간이 걸린다. 반면 물리적인 환경은 비교적 수월하게 교사의 의도를 반영할 수 있고 효과를 바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교실 환경 정리 및 꾸미기는 아주 중요하다.


  약 10년 전 '환경정리'는 중요성과 상관없이 고달팠다. 마치 시험 같았다. 일정 준비 기간을 준 뒤 정해진 날에 교장, 교감, 고참 선생님들이 반별로 돌아다니며 확인하였다. 말이 확인이지 평가다. 친구를 집에 초대하기도 쉽지 않은데 직장 상사와 동료가 내 공간을 확인한다니! 얼마나 머리 아픈 일이고 부담스러운가? 그 시절의 환경정리는 무조건 멋있게! 예쁘게! 잘 보이게(어른들에게)! 였다. 폼보드로 알록달록하게 만든 게시판 제목과 한지로 멋들어지게 제작한 나무 정도는 있어야 보일 수 있었다. 손재주가 없는 나 같은 사람은 돈을 써야 했다. 돈까지 쓰며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이 원래 목적을 얼마나 반영했을까? 다행히 요즘은 많이 달라져 이런 허례허식보다는 각자의 교육관을 어떻게 담을 것인지에 신경 쓴다. 예전에는 교사만의 일이라면 요즘은 교사와 아이들, 우리의 일이다. 단순히 ‘아름답게’가 아니라 ‘의미 있게’다.


  내가 있는 한국어 학급도 ‘알록달록’ 꾸며져 있다. 언제 누가 꾸몄는지 모르지만 오래된 건 확실하다. 작년은 코로나 핑계로 그대로 두었는데 다시 3월이 되니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칠판 왼쪽에는 색이 바랜 전통옷을 입고 있는 여러 나라 인형들이 오른쪽에는 절반만 남겨진 격자무늬 창문틀과 그 공간을 메우기 위해 한복을 곱게 입은 신랑 신부 인형이 붙어있다. 분명 한국어 학급의 특색을 살리기 위해서 꾸민 것이겠지만 땜질의 흔적이다. ‘얼쑤 우리 문화 좋을시고’라는 문구도 거슬렸다.


  더는 방치할 수 없어서 다 뜯었다. 거침없이 뜯었지만, 무엇으로 다시 채울지 고민스러웠다. 게시판만 봐도 우리 반의 특색을 바로 알 수 있으면 했다. 협동화를 할까, 나라 소개를 할까 하다 언어(글자)만큼 우리반을 나타내는 것이 없었다. 한 면은 아이들을 한국어로, 한 면은 모국어로 채우기로 했다. 한국어로는 아이들의 나라 이름을, 모국어로는 사랑을 계획했다. 표현 방법은 이미 선생님들 사이에 유명한 미술 활동을 활용했다. 


  우리 같이 교실을 꾸밀 것이라는 내 말을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아이들은 재밌어했다. 신나게 색칠하고 오리고 붙였다. 공부를 안 하고 한다고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너네가 하는 게 다 공부야' 하면서 웃었다. 아이들이 만든 것을 모으니 아주 만족스러웠다. 아이들이 글자를 짚어가며 읽는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자기가 만든 것을 자랑스럽게 옆 친구에게 말해주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베트남 문자를 까먹은 2학년 아이의 작품을 6학년 누나가 다시 고쳐주기도 하였다.


  한국어 학급에 오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주인공이 되는 경험이 별로 없다. 의사소통이 어려우니 친구들 앞에 나서기 쉽지 않고 학교, 학급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 이런 아이들이 적어도 한국어 학급에서는 주인공이다. 아이들이 주인공으로서 2021년 한국어 학급을 시작할 수 있어 다행이다.

이전 02화 한국어 학급을 아시나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