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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by 김윤담

얼마 전 아이가 진지하게 물었다.

- 엄마는 어떻게 키보드를 그렇게 빠르게 쳐? 엄마 자판에는 한글도 안 적혀 있는데?


요즘 방과 후 교실에서 컴퓨터 배우는 재미에 푹 빠진 딸은 새삼스레 엄마가 빠르게 타자 치는 모습이 신기해 보였다보다.

나야 뭐 타자질로 근근이 버는 인생이니까.. 뭐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내 모습이 신기하고 멋지다는 듯 물어오는 아이에게 그런 현실적인 답을 해줄 수는 없었다.


- 엄마는 30년이나 키보드를 쳤잖아. 뭐든지 오래 하면 다 이 정도는 하게 돼. 영어로 된 자판을 쳐도 막 한글로 술술술 써져. 머릿속에 다 입력되어 있거든.

- 나는 아직 1년도 안 됐는데

- 그냥 계속하면 돼. 계속하는 게 중요한 거야.


요즘은 아이에게 하는 말이 꼭 내게 하는 말 같을 때가 있다. 살다 보니 내 인생도 너무 길어서, 아직 나도 너무 어려서 한창 자라는 딸에게 전략적인 다정한 말을 건네면서 나도 한 마디씩 주워 삼킨다.


딸에게 계속하면 된다고, 계속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머릿속에는 아직도 어렵고 버거운 매일 쓰는 나의 일을 떠올렸다. 마음에 들지 않고 똥글같아도, 안 쓰는 것보다는 낫겠지. 오늘을 그냥 넘기는 것보다는 낫겠지.

꼬맹이가 지금 당장 타자속도가 느려도, 구구단을 못 외워도, 영어 파닉스 떼는 일이 여의치 않아도 실은 다 괜찮은 것을 안다.

오늘 엉덩이 붙이고 앉아 노력한 시간은 결코 허투루 증발되지 않을 테니까. 오랜 시간 끝에 자연스러운 속도를 갖게 된 누군가를 보는 것으로 위로와 용기가 생길 테니까.


그날 딸에게 나는 그런 모습이었을까?

눈 감고도 타닥타닥 빠르게 키보드를 지휘하는 손가락을 보며 아이는 그런 생각을 했을까? 계속하면, 된다. 뭐 그런 웅장한 생각을 했을까? 아니면 그런 생각의 싹이라도 텄을까?

알 수 없지만 난 그런 것을 자꾸 일러주고 싶다. '꾸준함'의 힘을 믿는 것.

내가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아이에게 무언갈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태도를 보여주고 싶다.


30년 넘게 해서 눈감고도 할 줄 아는 게 고작 타자질이지만, 앞으로 30년은 엄마로서 나날이 더 성장할 딸을 누구보다 든든히 지켜줄 수 있는 존재가 될 테다. 그런 생각을 하면 조금 안심이 된다.


녀석을 낳은 이후로 아이는 매일 커지고 있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기복 없이 그저 자라나기만 하는 건 이 아이가 처음이다. 키가 다 크면 마음이, 생각이 더 커지겠지. 그걸 지켜보는 것이 내 생의 또한 큰 재미겠지.

아이는 나를 쓰게 하고, 움직이게 하고, 생각하게 한다.

내가 먼저 지치지만 않으면 된다.


2025.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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