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가 화장실에서 나올때까지 우리 이불 속에 숨어 있자"
안방에서 실내자전거를 타고 있는 내게 와 아이가 말했다. 아직 좀 더 타야하는데.. 거절할까 했지만 녀석의 눈에 설렘과 장난끼가 가득해 거부하지 못했다.
마침 어제 시트를 갈아 뽀송한 하얀 이불 속으로 우리는 몸을 숨겼다. 이불 속에 마주 누운 우리는 쉿, 손짓을 해가며 눈을 맞췄다.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부릅뜨며 웃음을 참아봐도 아이의 콧구멍에서는 자꾸 큭큭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불 아래 아이의 맨 팔을 쓰다듬다가, 머리도 만져보고, 볼도 쓰다듬어본다. 그 귀엽던 빵실한 볼살이 다 어디로 갔나. 아쉽지만 여전히 살결은 보드랍다.
그럼 그렇지 화장실로 들어간 아빠가 몇 분 사이에 나올리는 만무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불 안은 숨이 막혀왔다.
'엄마 숨 좀 쉴래' 하고 이불을 휙 걷자, 아이는 큰일 난다는 듯 다시 덮어씌운다.
숨이막혀 죽을 것 같다는 듯 과장된 표정을 지어보이자 아이는 큭큭거린다.
"어차피 아빠는 화장실에 들어가면 30분 이상 걸린다고. 여기 그냥 누워있다가 물 내리는 소리 들리면 그때 뒤집어 쓰면 되지!"
"아 안돼. 다시 다시!"
굳이 굳이 이불 속으로 나를 밀어넣는 딸, 그리고 우리는 또 서로를 마주본다.
얘는 내가 정말 그렇게 좋은가.
더위도 많이 타는 녀석이 아빠 놀래키기를 핑계삼아 이불 속에 나를 붙잡아둘만큼.
아직도 신기하다. 누군가가 나를 이렇게 좋아해준다는게. 한시도 떨어지고 싶어하지 않는다는게.
큰 바위같은 아빠가 우리의 어설픈 수작에 놀라지 않을 것을 둘 다 알고 있으면서도 한동안 우리는 이불 속에서 진지한 작전을 펼쳤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났을 때, 비로소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우리는 서로의 입을 막고 몸을 잔뜩 움츠렸다. 하나 둘, 왁!!!
예상대로 남편은 눈도 하나 꿈쩍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 모습도 웃겨서 깔깔거렸다.
"거봐 내가 안 놀랄거라고 했잖아"
그래도 아이는 뭐가 그리 웃긴지 데굴데굴 구르며 폭소를 터뜨린다.
참 우습지.
불과 몇 년 전 우울이 내 인생을 통째로 집어 삼켰을때는 한번 화장실에 들어가면 감감무소식인 남편이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내가 싫은거라고, 필요 없어진거라고..
당시 비정상이었던 내 상태에서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간 뚱딴지같은 생각의 전개는 결국 죽음을 떠올리게도 만들었었다. 그렇게 취약했다.
잠깐 혼자있는 시간에도 모든 것을 다 내던지고 싶을만큼.
가족간의 사랑이란 것도 다 부질없던데, 하물며 남녀간의 사랑은 어떻겠어. 새털같이 가벼운 당신의 마음이 날 떠나기 전에 내가 먼저 버려야겠다. 네가 날 볼 수 없는 곳으로 꺼져주겠다.
닫힌 화장실 앞에서 그런 생각을 하던 날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이불 속에서 아이와 깔깔거린다. 그가 분명히 늦게 나올 것임을 알면서도 키득대면서 더는 엉뚱한 상상을 하지 않으면서 그저 부드러운 촉감 속에 몸을 맡긴 채로..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린 다음 드디어 나타난 커다란 존재를 반가워하는 것으로 이 장면을 끝낼 수 있다.
아 나는 안전하구나. 이들과 함께 있어서.
모두들 덕분이야.
2025.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