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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담 Aug 21. 2023

아들을 낳기 싫었던 이유

임신 테스터에 두 줄이 뜨던 날

남편은 장기 출장을 가 있던 터라 온전히 나 혼자서 설렘과 두려움, 기쁨을 맞이해야 했다.


첫 생리를 시작한 이후 내 생리 주기는 18~20일 정도로 매우 짧은 편이었다.

게다가 컨디션에 따라 부정출혈도 잦아서 한 달에 거의 대부분을 생리대를 착용해야 하곤 했다.

그래서였을까.


고등학생 때부터 막연히 나는 결혼을 해도 임신이 어렵지 않을까 지레 짐작했더랬다.

그럼에도 '임신'이라는 경험은 꼭 해보고 싶었다.


내 뱃 속에 나 말고 또 다른 생명이 살아 있는 그 느낌을 꼭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차곡차곡 시간이 흘러 스물 여덟살,

요즘 시대와는 맞지 않게 이른 나이에 도망치듯 결혼을 선택한 나는 신혼 생활 1년이 다 되어갈 무렵부터 본격적인 임신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산전검진을 위해 찾은 산부인과에서는 생리 주기가 워낙 짧은데다 다낭성난소증후군까지 있어 자연임신은 어려울 것이라는 진단을 들었다.

임신을 원하면 약물치료부터 시작하라는 의사의 말은 어쩐지 미덥잖았고,


두번째로 찾은 다른 병원에서는 생리 주기가 짧고, 불규칙적이라 배란일을 예측하기 어려우니 차라리 생리가 끝난 직후부터 관계를 가져보라고 권했다.


예상대로, 아이라는 '행운'은 쉽게 얻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당시엔 왜 임신을 '행운'이라고 떠올렸을까. 이때까지는 아이 존재 자체보다 '임신'이라는 행위를 가정을 구성하는 마지막 퍼즐 한 조각처럼 인식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지금은 그때보다 더 진실된 의미로서의 '행운'을 느끼며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정말로 원하는 누군가에게 임신은 '행운'이다.)


그러나 웬 걸, 두 번째 병원에서 찾았던 의사 말대로 임신을 시도하자마자 그야말로 한 방에 임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임신이 이렇게 쉬운 거였나? 의사들 말로는 자연임신은 어려울거라고 했는데...

넉넉하게 1년은 노력해볼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아기가 빨리 찾아와 어쩐지 싱거운 마음이 들 정도로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우리에게 왔다.


신체 변화에 예민한 탓에 4주만에 임신 사실을 알아버린 나는 심장소리를 듣는 날까지 기다림이 필요했다.

그리고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대부분의 초보 엄마아빠가 그렇듯

남편과 나는 아들일까? 딸일까? 궁금해하며 소꿉장난하듯 농담을 나눴다.


성별을 알기 전 남편과 나는 '아들'을 원했다.

남편은 단순한 이유로 첫 딸은 아빠를 닮는다면서, 외모에 대한 걱정(?)으로 그런 결론을 내렸다.

나는 장녀로서의 삶이 너무 불행했기에 내 자식 만큼은 장녀의 삶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또 여자로 이 사회에서 사는 일이 고단하게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만약 뱃 속의 아이가 딸이라면 둘째는 절대로 갖지 않으리라고 벌써부터 마음을 먹었다.


'내리사랑'이라는 명분으로 겪어왔던 가정 내에서의 차별은 내게 큰 상처였다.

한상 가득 차려진 밥상머리에서도 고기, 햄 등의 반찬은 동생쪽으로만 기울었고

할머니댁에 가면 할머니는 고추가 잘 있나 보자면서 흐뭇하게 웃으셨다.

대학교를 다닐 때 내겐 당연했던 아르바이트도 동생이 하면 엄마는 그저 안쓰러워 눈물바람에

밤마다 삼겹살을 구워 바치기 일쑤였다. 그나마도 너무 힘드니 그만 두고 용돈을 타 쓰라고 하던 엄마였다.

아들은 냉장고에 한번 들어간 밥은 먹지 않는다며, 일하다가도 들어와서 새 밥을 차리고

힘들다는 푸념은 내게 쏟던 엄마,

아들은 스트레스 받으면 안된다며 일상에서 일어난 온갖 종류의 자질구레한 불평불만을 내게만 토해내던 엄마, 나는 그런 엄마가 되고싶지 않았다.


우주같은 초음파 화면을 바라보며 의사선생님이 '핑크색 옷을 준비하면 되겠어요.'라고 말하던 날

나는 뱃 속의 아이가 나의 첫 아기이자 마지막 아기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내가 받았던 모든 종류의 억울함과 서운함을 이 아이에게는 물려주지 않으리 다짐했다.


(너무나 남자답게 생긴 자신을 닮을까봐 딸이 아닌 아들을 바랐던 남편은

딸이라는 결과에 망연자실하듯, 나를 닮으면 어떡하지? 걱정했으나

지금은 자신과 너무나 똑 닮은 딸을 세상 누구보다 가장 예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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