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담관 절제하고 소장과 십이지장을 잇는 수술 후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의 일이다.
인생 최대의 고비였던 그 시간, 몸은 몸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피폐해지고, 이해할 수 없는 엄마에 대한 원망에 사로잡혀 하루종일 혼잣말로 욕을 지껄이다 웃다를 반복하던 나날이었다.
예상보다 입원기간이 길어지면서 남편이 아이를 돌보러 지방에 내려가 있는 동안 간병인을 고용한 적이 있다.
60대쯤 되었을까. 우리 부모 나이대와 비슷하거나 약간 많은 연세의 분이셨는데 그때는 내가 화장실도 혼자 다닐 수 있을 정도여서 그분이 하실 일은 별로 없었다. 갑자기 열경련이 오는 응급상황에 대비해서 자리를 지키는 정도의 역할을 요청드렸었다. 그래서 하루에 대부분을 간이침상에 누워 맞고를 치고 낮잠을 주무시곤 했다.
그분은 입맛이 없는 내게 계속 뭐라도 먹어야 한다고 반복해서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땐 정말이지 그 이야기가 듣기 싫었다. 그러다 아주머니와 함께 병동 산책을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엄마와 비슷한 나이대의 분이라 당시 엄마와 나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심적으로 취약한 때라 그렇게라도 위로가 고팠던 것 같다.
그때 아주머니는 내 이야기를 다 듣고도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자식이 부모 이기려고 하면 쓰나.
엄마가 너무하긴 했지만,
자기가 먼저 전화드려.
천륜은 못 끊는 거야."
겨우 다잡았고 털어놨던 마음이 또 무너졌던 순간이었다. 공감받지 못했다는 좌절감이 나를 괴롭혔다.
이 또래의 사람들은 정말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내 엄마 또한 비슷한 마음으로 나를 괘씸하게 여길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더 힘들어졌더랬다.
그렇게 나는 많은 공감이 필요했다.
내 편에 서서 나를 안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누구도 확실하게 내게 이야기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괴로워서 상담을 신청해 내 병실로 찾아온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마저도..
상담은 내게 확실한 해결책을 제시해주는게 아닌 항상 애매모호한 답변으로 마무리 되었다.
물론 의사 입장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땐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었다.
엄마로부터 멀어져.
도망쳐.
충분히 그럴 수 있어.
그래야만 해.
라는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이런 말을 해줄 이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단호하게 선택했어야 하는 건데
용기가 부족했고, 내 속에 확신이 없었다.
토해내듯 브런치에 과거를 털어내 놓고, 다음 이야기를 적을 자신이 없어 한동안 도피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나조차도 자신이 없는데 누군가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최근 시작한 스레드에 남긴 글에 누군가 이런 댓글을 달았다.
"물고기 낚는 법을 알아가는 중이라 생각하면 어떨까, 훗날… 나쁜 엄마가 되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알게 될 거라 생각되는데… 위로가 안 되겠지? 난 나쁜 엄마가 못되어 슬프거든"
나쁜 엄마를 물고기 낚는 법을 알려주는 사람으로 치환할 수 있다니..
나쁜 엄마가 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될 거라니..
내 긴 글을 읽고도 지독히 엄마의 관점으로 이야기하는 댓글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예전에 나였다면, 이런 짧은 글에도 휘청이고, 잠시나마 설득되어 잠 못 이뤘을 테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다.
내가 한 선택에 당당하기 때문에.
만일 나의 엄마가 내게 한 일이 물고기를 낚는 방법을 알려준 거였다면, 그 낚싯대는 이미 부러졌다.
이제 나는 누구에게도
내가 나쁘냐고, 내가 못됐느냐고 묻지 않는다.
엄마와의 연을 끊고 내 삶을 찾았고, 내가 세상에 전할 메시지를 찾았노라고 얘기할 테다.
내가 죽도록 고민하고 얻은 이 결말을 당신에게도 전하겠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