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는 교회에 꽤나 열심히 다녔다. 대단한 신앙심 때문은 아니었고, 다른 학교에 다니는 친한 친구와 일요일에는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쏟아내며 뜨겁게 기도하는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그저 매일 한 가지의 소원만을 빌었다.
"사랑받게 해 주세요"
한 치의 보탬 없이 매 기도시간마다 이 여덟 글자만을 빌고, 또 빌었다. 그때는 정말로 기도 주제가 이것뿐이었다. 심지어 수능을 몇일 앞둔 상황에서도 새벽기도회에 나가 똑같은 말을 되뇌었다.
그리고 스물셋, 한 남자를 만났다. 어느 날 친구가 갑자기 캠퍼스로 불러내더니 알이 너무 두꺼워 원래 본인 눈 크기보다 절반 정도 작아 보이게 만드는 뱅뱅이 안경에 까까머리, 통이 벙벙한 스포츠 반바지 차림의 그를 너의 남자 친구라며 소개해줬다.
원래 엉뚱한 친구이긴 했지만, 다짜고짜 '얘가 너의 남자 친구'라니. 게다가 이렇게 후줄근한 차림의 남자라니. 면전에 대고 뭐라 하지도 못하고 눈만 동그랗게 뜨고 눈치를 주는 나를 보며 친구는 그저 확신에 찬 표정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사실 그도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갑작스레 불려 나와 어찌할 바를 모르는 민망한 상황이었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됐다. 딱 봐도 순진하고, 착하게 생긴 전형적인 공대생 스타일이었던 그. 내가 아무리 사랑받고 싶고, 연애를 하고 싶어도 이건 아니지. 한 마디로 정말 내 타입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마련된 자리이니만큼 차 한 잔만 하고 적당히 마무리해야겠다 싶었다.
숫기가 없던 남자는 그저 입 꾹 다물고 음료가 든 컵만 만지작 거릴 뿐.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그 시간은 너무나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다신 볼 일 없을 줄만 알았던 사람은 그날부터 매일 아침, 점심, 저녁 내게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당시 휴학을 하고 일을 하고 있었던 내게 그는 아침에 일어났는지, 점심엔 무얼 먹었는지, 저녁엔 집에 잘 들어갔는지 딱 정확하게 이 세 가지 만을 매일 물었다. 대화를 좀 더 이어나가는 스킬이 없는 건지, 이런 식의 대화가 그만의 스킬인지 아리송할 만큼 애매한 관계는 몇 달 동안 이어졌다.
그렇게 진전 없는 메시지만 오가던 중 ROTC였던 그가 한 달 동안 훈련을 떠나게 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됐다. 늘 오던 시간에 연락이 오지 않자 문득 그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매일 시간 맞춰 오는 스팸문자쯤으로 여기던 그 규칙성이 깨지자 약간 내쪽에서 안달 난 형국이 되었다.
그리하여 훈련기간 동안 답이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리고 그가 언제 복귀하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언제 와?"라는 메시지를 처음으로 먼저 보냈고,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그와 약속을 잡아 만나게 됐다.
8월의 습한 저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루 종일 밥 먹고, 영화를 보고, 차를 마시면서도 별 말이 없던 그는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서 무겁게 입을 뗐다. 종일 매고 다니던 가방 속에서 축축하게 젖은 장미꽃 두 송이를 내밀며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한 송이는 외로우니까 두 송이를 준비했다고. 그는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지 챕스틱을 꺼내 발랐다.
그 바보스런 모습을 보며 얼마나 웃음을 참았는지, 한 여름에 벌벌 떠는 그를 보며 거짓말 약간 보태 이러다간 얘가 쓰러지겠다 싶어 나도 좋다고 대답해버렸다. 처음이었다. 내 앞에서 그렇게 벌벌 떠는 사람은, 내 눈빛, 말투, 행동 하나하나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매 순간 따뜻한 온기로 감싸주는 사람.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존재일 수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준 사람이라 축축한 장미꽃 두 송이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가슴이 뜨거웠다. 그렇게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사랑을 늘 갈구하면서도, 늘 의심하고 시험하려 했던 나는 시시때때로 왜 나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해댔다. 그때마다 그는 심심하기 짝이 없는 대답으로 나를 안심시켰는데 그 얘길 듣고 싶어서 계속 물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다 좋아"
스물셋, 콩깍지 제대로 씐 혈기왕성한 남자에게 무엇인들 싫은 게 있었겠냐만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는 멍텅구리 같은 표정은 나를 안도하게 했다.
손에 땀이 많다며 한 달이 넘도록 나란히 걸으면서도 손 한번 스치지 않던 사람, 결국 내가 먼저 손을 잡았고, 세상 숙맥처럼 굳게 다문 입술에 뽀뽀도 내가 먼저 했다. 그를 만나고 나서 내게도 빛이 난다는 걸, 그리고 그 빛을 보고 따라와 준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그래서 매 순간 감사했다.
연애하는 5년 동안 그는 장교로 2년 군 생활을 했고, 전역 후엔 먼 남쪽 도시에 취업해 장거리 커플로 지냈다. 저녁에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 하고 헤어지는 가벼운 만남, 데이트가 그리웠던 우리는 스물여덟 조금은 이른 나이에 결혼을 결심했다.
그는 낯선 곳에서 잘 지낼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난 전혀 상관없었다. 오히려 내가 나고 자란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마음 때문인지 설레기까지 했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두렵지 않았다.
아직 찬 기운이 남아있던 3월의 어느 날, 처음으로 내 마음을 풍족하게 해주는 남자와 결혼을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