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초등학교에 입학하다
2024년 3월 4일. 전국의 7세 아동을 둔 부모들은 모두들 설레는 마음으로 잠에서 깨지 않았을까. 나 역시 그랬다. 그렇다. 오늘은 대망의 초등학교 입학식 날이었다.
새 꼬까옷에 반짝이는 빨간 구두, 알록달록한 책가방 멘 아이의 손을 잡고, 남편과 나는 집 앞 초등학교로 향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무지갯빛 컬러를 담은 꽃다발도 야무지게 챙겨서. 그런데 너무 만반의 준비를 했던 것일까. 생각 외로 꽃다발을 들고 온 부모님들이 없어서 손이 약간 민망하긴 했다.
아무렴 어떠랴. 100명이 넘는 아이들 중에서도 한눈에 쏙 집히는 우리 딸 사진 찍느라 남의 시선 따윈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아무 다른 부모님들도 그랬으리라.
첫 아이가 초등학교에 간다는 것은 부모에게 어떤 의미일까. 유아기에서 아동기로 넘어간다는 아쉬움, 본격적인 학령기에 들어선다는 긴장감 등등 복잡한 심경이 밀려온다.
딸의 초등학교 입학은 내게 벼르던 시간이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날들은 모두 오늘을 위한 밑작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비장한가. 그러나 정말 기다려왔던 시간임은 분명하다.
많은 부모들이 골치 아파하는 초등 입학의 문턱에서 왜 이렇게 자신만만하냐고 묻는다면, 내겐 답해줄 말이 '있다'.
나는 아이를 키우는 동안 '품'을 많이 들이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분명 첫째이지만 둘째처럼 키웠다고 해야 할까. 누군가 내 육아방식의 키 포인트를 묻는다면 크게 두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 째는 '우는 애 냅두기'
나는 아이가 우는 꼴을 잘 두고 보는 엄마였다. 두 돌 무렵부터 떼가 늘어 울음으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아이의 모습을 볼 때면 특히 그랬다.
'지금 네 마음대로 안 돼서 속상하구나. 그럼 울어라. 울 수 있는 만큼 울어봐라. 그게 운다고 되는가 안되는가. 한번 보자.'
재활용 쓰레기 버리러 나가야 하는데 나가기 싫다면서 엉엉 울던 아이가 울음이 통하지 않자, 상황 파악 끝에 단번에 울음을 그친 뒤 "엄마, 그럼 엄마랑 같이 쓰레기 버리러 갔다가, 편의점 갔다가, 와서 TV 보자!"라고 말하며 눈물을 싹 닦고 일어나는 영상은 그 시절 아이가 그리워질 때 자주 꺼내보곤 한다.
스스로 감정을 통제하고, 엄마가 원하는 바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짚어낸 똘똘한 바가지머리 소녀는 내 아이폰 속에 저장되어 있다.
그날 난 감정을 잘 다스린 아이에게 딸기맛 아이스크림을 선물했다.
그런 식이었다. "아이스크림 줄 테니 울지 마"라고 말하지 않도록 조심했다. "뭐 해주면 울음 그칠래?"라고 묻지 않았다. 스스로 감정을 다스리고 나면 부모의 권위로서 달콤한 것을 입에 물려주었다.
"엄마가 TV 틀어주면 양치할 거야."라는 딜에는 응하지 않았다. "양치는 당연히 해야 하는 거고, 조건은 엄마만 정할 수 있어."라고 단호히 답했다. 부모로서의 권위가 통하는 시기를 제대로 누렸다. 윽박지르거나 겁 주지 않고, 단호하게 이야기하고, 아이가 원하는 대로 휘둘리지 않음으로써 내 권위를 지킬 수 있었다.
어차피 사춘기가 되면 부모로서의 권위는 무슨 하는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문 쾅 닫고 들어가 버릴 텐데 엄마 말이 세상의 전부인 시기에 잘 활용해 보자는 가벼운 마음이었지만 후에 유튜브나 책을 통해 부모교육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방식이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때부턴 육아에도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공부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듯이, 내겐 '육아'의 재능이 있구나라는 걸 느끼면서 아이를 키우는 내내 힘듦보다 즐거움이 훨씬 크게 느껴졌다.
두 번 째는 '매일 습관 들이기'
아이가 네 살 즈음 됐을 무렵부터는 '매일' 무언가를 하는 습관을 들였다. 그 시작은 영어 관련 패드학습이었는데 시작하게 된 계기는 이러했다. 코로나로 인해 가정보육 하는 기간이 늘어나면서 아이와 놀아주는데 밑천이 바닥난 것이다. 풍선놀이, 전분놀이, 잡곡놀이, 종이컵 놀이 등등 온갖 엄마표 미술놀이를 준비해 줘도 잠시뿐. 뒤처리가 몇 배로 힘드니 에라 모르겠다. 패드로라도 놀아라! 싶은 생각에서였다.
36개월까지 영상을 보여주지 않고 키웠는데, 그 무렵부터는 영어 영상을 노출해 주는 게 좋다는 이야기를 유튜브에서 본 뒤 '페파피그'같은 귀여운 애니메이션을 조금씩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 수준에 맞는 영어 패드학습을 시작해 게임하듯 즐길 수 있도록 유도했다. 패드나 영상에 노출이 워낙 적은 아이였기에 무척 흥미롭게 즐겼다. 이왕 패드로 놀 거라면 학습하며 노는 게 엄마로서 죄책감도 덜했다. 매일 10분 정도 게임처럼 알파벳을 익히는 형태였는데 이때 '매일 습관'이 제대로 잡혔다. 레벨업을 거듭하면서 3년째로 접어든 지금은 꽤 어려운 단계에 이르렀는데도 하루 마무리 루틴으로 자리 잡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할머니집에 가나, 여행을 가나, 엄마가 입원을 하나, 애가 입원을 하나 어디서든 자기 전에는 그 학습을 해야만 잔다. 물론 스스로 하는 것은 아니고, 시키면 잘 따라주는 정도이다.
'매일 습관' 하나가 잘 자리 잡으면서 그 이후로는 한 두 가지 미션을 계속 추가해 줬다. '영어 낭독'과 '일기 쓰기'. 낭독이라고 해봤자 처음엔 'Apple, Ant, Animal' 같은 단어만 들어있든 하드북을 따라 읽는 수준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그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을 이뤘다. 일기는 '밥을 머것다. 맛잇어따.' 정도로 쓰지만 내용보다는 매일 하는데 의의를 두고 따로 첨언을 하진 않는다. 이러한 저녁 루틴을 한지도 벌써 1년은 훌쩍 넘은 듯하다.
패드학습에서 약간의 레벨업을 할 때마다 좌절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일 때면 이렇게 말해주곤 했다.
"원래 새로운 걸 배우는 건 약간 힘들어. 누구나 다 그런 거야. 엄마도 그랬고, 아빠도 그랬어. 그래도 해 내서 아는 게 조금 더 많아지면 생각주머니가 넓어질 수 있어. 생각주머니는 넓은수록 좋은 거 알지?"
너무 어려워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으면 한 단계 낮은 레벨로 내려가서 다시 할 수 있도록 조언했다.
"우리가 지금 이걸 배우는 건 모르기 때문에 하는 거야. 틀리는 건 당연하지. 너무 어려운 건 쉬운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해 봐."
실은 이게 다이다. 이 두 가지를 지금까지 '악착같이' 지켜왔을 뿐이다. 하지만 난 이것으로 초등입학 준비는 마쳤다고 생각하고, 자부한다. 대단한 선행학습을 마쳐서가 아니라, 아이가 영어를 읽을 줄 알아서가 아니라, 한글을 다 떼서가 아니라 '매일 무언가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에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매일 하는 루틴의 이유를 묻지 않는다. 너무 어릴 때 자연스럽게 시작해서일 수도 있고, 물어봤자 엄마가 '그냥 하는 거야'라고 해서 일수도 있다. 어쨌거나 아이의 자아가 말랑할 때 잘 구슬려 좋은 습관을 심어줬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로 추리니 너무 단출해 보이긴 하지만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고,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다.
때론 이런 생각도 든다. 나에게도 '나 같은' 엄마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화자찬 같지만 실은 진심이다. 이미 앞선 글에서도 여러 번 고백했지만 딸을 키우면서 내가 원했던 '엄마'의 모습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내가 완벽한 엄마라는 뜻은 전혀 아니다. 내가 인식하는 어떤 부분에서의 모습은 내가 고팠던 '엄마'의 반영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불행한 가정사로 얼룩졌던 학창 시절에 나는 성실한 학생이었지만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선생님들은 항상 수업시간에 열심히 듣는 학생으로 인식했지만 정작 성적은 그에 못 미쳤다. 엉덩이는 무거웠지만 늘 공상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누군가 나에게 방법과 비전을 제시해 줬다면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싶은 아쉬움은 나를 더 노력하는 '엄마'로 만든다. 그런 내가 썩 마음에 든다.
못난 부모의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말한다. '어렸을 때 보고 배운 게 없어서 저렇다고..' 내 폐부를 가장 찌르는 말이다. 결핍은 늘 대물림된다는 전제에 반론을 제기하고 싶다. 결핍을 보듬어 채우고 승화시키는 사람도 있다고. 모든 이가 불행을 빌미로 삼아 자식에게 똑같은 행동을 하진 않는다고.
아픈 과거로부터 자식을 사랑하는 방법을 익히는 내가 좋다.
때론 나도 내가 엄마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