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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기고래 May 17. 2024

틀려도 괜찮다는 뻔한 말

학생을 가르치며 동시에 나를 가르치기

자식이든 학생이든 누군가를 가르치다 보면 자꾸만 욕심이 날 때가 있다. 하나를 알려주면 셋을 아는 아이를 만나면 이것도 가르쳐주고 싶고 저것도 도전하게 해보고 싶다. 과외라는 게 사실 학생이 뭔가 부족할 때 선생님의 필요를 느껴 받는 서비스다 보니 당연히 잘하는 학생보다는 그렇지 못한 학생 비율이 월등히 높다. 그것에 대한 불만도 없다. 어제 가르쳐준걸 오늘 잊어버려도, 시험에 이거 무조건 나오니까 외우라고 시험 전날 알려주고 종이가 뚫리도록 형광펜칠을 했지만 시험 다 틀려도, 사실 제일 속상한 건 학생이지 않겠나 싶고 다음엔 한 번 더 말해줘야겠다, 또는 다른 방법으로 설명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틀렸다고! 못한다고! 부끄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단다 전국의 학생들아! 선생님은 너희를 평가하지 않아!! 시험이 너희를 평가할 뿐...) 하지만, 그럼에도 영특한 학생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신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여름 방학 동안 영문법을 마스터해야 한다는 중1학생을 과외한 적이 있다. 3개월 정도 되는 시간 동안 영문법을 마스터하려고 하면 어느 정도 기초가 잘 돼있어야 할 텐데라고 걱정하면서 첫 수업을 했는데 아니 이게 웬걸. 3개월이면 충분히 마스터하겠다, 이 친구는 웬만한 고1, 고2의 영어 실력과 맞먹고 있었다. 외국에서 살다 온 것도 아닌데 해석이면 해석, 이해도면 이해도, 어휘면 어휘 모든 것이 월등해서 매시간마다 가르칠 맛이 났다. 욕심이 나서 고등학교 수준 문제집도 사비로 사 갖고 가서 풀려보면 꽤나 잘 풀어냈다. 들어보면 수학도 벌써 미적을 공부하고 있고 재밌다고 해서 이런 친구가 과학계의 미래가 되겠구나 싶다. 영리한 제자를 가르치는 게 이렇게 재밌는 일이구나 하는 맘에, 친구들을 만나면 자꾸만 이 과외돌이의 영특함에 대해 감탄하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어머님 저에게 맡겨주시면 꼭 서울대 이상 보내겠습니다라고 혼잣말을 한다.


그런데 이 친구에게 안타까웠던 건 틀리는 걸 극도로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100문제 중에 1문제를 틀려도 너무 스트레스받아했다. 사실 그런 마음이 바탕이 됐기 때문에 이렇게나 영어를 잘하게 된 것도 있을 텐데 뭐든 과하면 독이다. 2문제를 틀리면 다 틀렸다고 생각하는데 이 모습이 어린 시절의 나 같아서 더 맘이 아렸다. 사실 나도 어릴 때 틀리는 게 너무 싫었고 선생님들이 충분히 잘한다고 이야기하는 건 입바른 소리 취급했던 지라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공부 못하는 친구들(나 빼고는 다 못한다고 생각하며 살던 안하무인)은 애초에 그런 애티튜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잘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나에게 만족하지 않고 끝없이 고칠 부분을 고쳐나가야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일희일비하지 말자고 생각하며 고등학생 시절엔 모의고사 전 과목에서 한 문제 틀리던 날도 기뻐하거나 스스로를 기특해하기는커녕 대체 왜 한 문제까지 맞히지 못했는지 자책하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나의 영리한 과외학생은 실수를 많이 했다고 생각하면 몸을 벅벅 긁기도 하고, 이런 완벽주의가 너무 심하다 보니 문제를 좀 틀릴 때면 어려운 문제가 아닌데도 이 문제는 어려워요, 또는 이해가 안 돼요라고 문제 탓을 하기도 한다. 한 문제 틀리면 " 아 망했다" 두 문제 틀리면 "아 다 틀렸네" 그 이상부터는 "아 진짜 아 짜증 나" 이렇게 중얼거리는데 이게 반복되다 보니 스스로도 쉽게 지쳐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잘하고 싶은 마음, 뭔가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 안 하겠다는 말은 안 하는데 아직 어린애가 이렇게 스스로를 괴롭히는 게 너무 안쓰러울 뿐이었다. 내가 아무리 틀리는 거 크게 상관없고 네가 몰랐던 걸 알게 되는 게 중요하다고 얘기해도 안 먹힌다. 만점이 아니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라고 말하는데 내가 어렸을 때 하던 말이랑 너무 똑같아서 마음이 너무 먹먹해졌다. 끝없이 배우고 싶은 마음은 자동차의 액셀, 스스로를 혼내는 마음은 브레이크와 같다고 생각하는데 자동차도 액셀과 브레이크를 너무 자주 번갈아 밟다 보면 쉽게 기름이 바닥나고 기어에 부담이 가듯이 사람도 마찬가지다. 죽을 때까지 뭔가를 배우고 익히며 살아갈 텐데 내가 한 노력은 잊은 채 실수나 잘못한 부분만 신경 쓰며 살다 보면 금방 지쳐버리고 만다. 느긋하게 나를 기다려 줄줄 알아야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결국 나에게 남는 건 점수가 아닌 지금 내가 열심히 했던 그 기억이고 그 기억의 힘으로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곤 했지만 정작 그걸 나도 서른이 넘어서야 실감했다. 아직 이 친구는 내 말이 귀에 들어올 단계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영특한 친구니까 나중에 혹시라도 힘들어지면 본인이 또 답을 찾아가리라 믿는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끝없이 옆에서 배우는 과정이 결과보다 더 즐겁고 스스로를 칭찬해 주며 인정해 줘야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걸 가르쳐주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러면서 나 스스로도 또 돌아보게 된다. 나는 내 기준에 맞는 삶을 살겠다고 생각하면서 조금이라도 그 기준에 어긋나는 모습이 나오면 얼마나 나를 몰아세웠는지. 어쩌면 가르침이란 건 어릴 적 본인에게 필요했던, 내가 듣고 싶었던 말들을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과외돌이를 안타까워하고 또 응원하는 마음으로 나 스스로를 보는 연습을 하고 있는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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