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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쎄 Sep 02. 2021

#6-1.인종에 따라 정형화된 여성에 대한 역할극

국제적 관광산업과 히네떼라스, <그것들!(Stuff!)>

코코 푸스코(Coco Fusco, 1960~ )는 1990년대 후반에 들어 여성의 정체성에 주목하게 된다. 여성의 하위 주체적인 위치는 자본주의의 세계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이중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후기식민주의 시대의 여성들은 인종에 따라 구축된 문화적 스테레오타입을 상업적이고 국가적 필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재연해야 되는 조건에 놓여 있다. 푸스코는  카리브해의 원주민이자 쿠바의 히네떼라스를 연기하며 국제화된 관광산업과 섹스관광에서 서구의 관광객들과 원주민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호문화적 행위들을 재구성하여 문화적 타자의 저항적인 목소리를 통해 차별적 스테레오타입에 저항하고자 한다. 제1세계와 제3세계를 가로지르며 인종과 젠더의 중첩된 문제 속에서 주체로 위장된 여성 타자를 둘러싼 위선적인 현실을 드러내고 전복한다.     

코코 푸스코는 나오 바스타멘(Nao Bustamante, 1950~)과 함께 관광산업을 둘러싼 라틴여성과 음식 그리고 섹스에 대한 풍자적 퍼포먼스 <그것들!(Stuff!)>(1996~1999)을 제작했다. 히스패닉 캐리비안 지역에서 휴가를 보내는 서구 유럽인들을 대상으로 한 이 퍼포먼스는 미국과 영국, 덴마크, 스웨덴, 뉴질랜드의 크고 작은 도시에서 순회 상연되었다. <그것들!(Stuff!)>은 연극과 같이 대본을 기초로 관객들을 극의 중요한 등장인물로 참여하게 하여 함께 극을 끌어가도록 구성했다. 카리브 지역을 찾는 국제적인 외국인 관광객들과 관광산업에 종사하는 지역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각본은 멕시코의 관광지의 주민들과 쿠바의 아바나에서 만난 히네떼라스 그리고 유럽의 여러 도시로 퍼진 라틴계의 섹스워커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했다. 때문에 퍼포먼스는 관광산업을 통해 재원을 조달하는 카리브 연안의 국가들을 비롯한 ‘제3세계 국가’들의 현실과 섹스관광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제3세계’ 여성들의 현실을 포괄한다.

극은 다큐멘터리적 요소와 연극적인 쇼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일기체로 쓰인 엽서 글은 자전적인 경험과 수집된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이를 푸스코와 바스타멘이 무대에서 번갈아가며 낭독한다. 극의 시작과 중반에 비중 있게 삽입되는 엽서 사연들은 거리의 행상, 섹스워커, 라틴계 여성 등 관광 산업을 둘러싼 화자들의 목소리는 카리브 해 관광산업에 대한 다각적인 시선을 대변한다.


쇼는 2부로 나눠지는데 여행사에서 고객들에게 가상의 관광 체험을 제공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1부는 원주민의 전통적 제의 퍼포먼스를, 2부에서는 강도 높은 상호문화적 섹스를 위한 실전 체험으로 관객들을 초대한다. 주요 등장인물은 여행사 직원인 로사와 블랑카 그리고 여행사 대표인 트리플 E와 트래블 테이스터들이다. ‘남반구 전인성 건강 학회(Institute for Southern Hemispheric Wholeness)’의 총책임자인 트리플 E는 서구인 특히 유럽 백인 남성의 구미에 맞는 관광 서비스를 개발하여 비싼 비용에 불만족스러운 휴가를 보내는 대신 안락한 집안에서의 ‘후기 장소적 여행’(post-spacial travel)을 제안한다.     


“다음 휴가 때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해보셨나요?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고 싶으신가요? 많은 고객들은 따뜻한 곳으로의 여행을 일 년  내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감각적 아름다움과 고대의 경의를 목 빠지게 기다립니다. 그러나 원통하게도 열대성 폭우와 복면 쓴 도둑들, 기생충들과 가난으로 괴로워하며 돌아오게 됩니다. ...(중략)...여러분들은 완벽한 영혼의 음식이 필요합니다. 오직 사람만이 줄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을 없이 최고의 것을 경험하는 것은 어떨까요? 저희가 땀 없는 열기, 혁명 없는 제의와 이질 없는 우아한 서비스를 고안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디로도 가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희가 배달해드립니다. 제3의 밀레니엄에 도달하게 되면서 여러분은 곧 후기 장소적 여행의 즐거움을 시작하게 됩니다.”      


 영상과 음성만으로 등장하는 트리플 E는 관광객들 또는 관객들을 가상의 여행 속으로 이끄는 서비스의 안내자이자 퍼포먼스의 진행자이다. 트리플 E의 신분은 매우 모호하다. 우선 무대 중앙에 배치된 비디오 스크린에는 단정한 차림에 콧수염을 한 한 남자의 얼굴이 화면 가득 채운다. 어떤 배경 설명도 없이 화면 속에 떠오른 얼굴과 음성이 그에 대한 정보의 전부이다. 따라서 관객은 주어진 트리플 E의 이름과 언어, 그리고 억양으로 그에 대해 추측한다. 본명은 엘자르도 에두와르도 엔카나치온, 존스(Elizardo Eduardo Encarnacion, Jones)로 스페인계의 이름에 영미권의 성을 가졌고, 북미권의 영어 발음을 구사한다. 관객은 그의 외모와 이름, 그리고 언어적 지표로부터 그의 혈통과 배경이 제1세계에 닿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트리플 E가 북미권 혈통이라는 암시는 여행사의 주요 고객들이 속한 지역과의 혈통적인 연관성을 보여주며 여행사의 이미지에 대한 안전성을 확보한다. 그리고 그 외의 어떤 배경설명도 제거되어 앞으로의 여행이 비역사적이고 비정치적인 이상적 파라다이스로의 관광이 될 것을 암시한다.


지치고 무료한 일상을 벗어나 색다르고 이색적인 휴가를 보내려는 서구의 관객들에게 따뜻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카리브 해는 매력적인 휴양지다. 그러나 열대성 기후와 벌레, 이질, 강도와 구걸 등으로 대표되는 ‘제3세계’의 불쾌한 요소들은 안락하고 평화로운 휴가를 방해한다. 때문에 트리플E의 여행사는 가상의 관광서비스를 통해 이러한 요소들을 제거한 완벽한 파라다이스로서의 카리브 관광을 제안한다. 이렇게 고객 맞춤형 관광체험이 시작된다. 퍼포먼스 현장에서 ‘트래블 테이스터’(Travel tasters)로 참여할 네 명의 관객을 선발한다. 일종의 신종 여행 체험단인 이들은 입장 시 배부된 티켓의 색깔에 따라 모집된다. 


선발된 네 명의 트래블 테이스터들은 요리사 모자를 착용하고 무대의 테이블에 자리 잡는다. 그리고 만물의 어머니이자, 대지의 수호자인 쿠타말리(Cuxtamali) 여신에 대한 제의를 시작한다. 무대 위로부터 조명을 받으며 커다란 책이 내려오고 토속적인 악기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콜럼버스 이전 시대(pre-Columbian era)풍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블랑카가 레인스틱 연주를 하면서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리고 주문을 외듯이 트래블 테이스터들을 이끌며 고대의 신이 내린 대지의 풍요로움에 다 함께 감사하는 의식을 시작하면 테이스터들은 이에 제창으로 응답한다. 


블랑카가 무대의 아래쪽을 레인스틱으로 지시하자 조명이 켜지고 로사가 등장한다. 음식카트를 밀며 나타난 로사는 블랑카의 낭독에 맞춰 발을 구른다. 여사제인 로사는 여신과 접신하고 블랑카는 이를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변사로써 극을 이끌어간다. 여신 쿠타말리는 물, 바람, 불이라는 기존의 세 명의 애인들을 대신할 새로운 애인으로 음식을 취할 것을 선언한다. 블랑카는 전설의 새로운 버전을 채택하게 된 것을 알리며 12번째 달의 순환에 따른 제의로 로사에게 칼춤과 피의 희생을 제안한다. 블랑카는 테이스터들과 함께 한 목소리로 “희생의 제의를!”이라고 외치며 로사에게 자기희생의 제의를 요청한다. 이에 당황한 로사는 여신이 대지에 열매 맺게 한 과일이 곧 여신이라며 테이블 위의 과일들을 칼로 내려치는 것으로 상황을 모면한다. 


푸스코는 <그것들>에서 다시 한 번 관객들을 ‘전통적’인 원주민의 세계로 초대한다. 퍼포먼스는 그럴듯해 보이는 문화적 스테레오타입들로 채워져 있지만 결정적으로 전형성으로부터 벗어난다. 퍼포먼스는 민속적인 라틴풍의 배경 음악과 원주민 코스튬, 칼춤을 추는 여사제, 그리고 세 명의 애인을 둔 성적으로 충만한 여신 등 관광객들의 흥미를 끌만한 이국적인 요소로 가득 채워져 있다. 작가들은 여기에 무대 뒤편의 장면을 추가한다. 공연 내내 감지되는 로사와 블랑카의 미묘한 갈등과 신경전은 둘의 말다툼이 머리채를 잡고 서로를 밀치는 몸싸움으로 번지면서 수면 위로 드러난다.      


블랑카 :로사 너 알기나 해? 니가 의식을 다 망쳐버렸잖아. 미쳤니. 네 문제가 뭔 줄 알아?

(로사는 무시한다.)

블랑카 :로사 듣고 있어? 다른 사람을 찾아야겠어!

로사 : 뭐 내가 망쳤다고? 그게 얼마나 멋진 마무리였는데!

블랑카 : 정신 차려, 네가 이상한 외계인 같은 걸로 망쳐놨잖아.

로사 : 우리 조상은 선혈 낭자한 누구 생각보단 이렇게 했을 거라고!

(로사가 비디오 재생을 한다.)

블랑카: 콘트롤 키 내놔

(콘트롤을 뺏으려고 둘이 싸운다.)

블랑카가 로사의 가발을 벗기고, 로사가 블랑카를 밀치고 가발을 벗긴다.     



둘의 싸움은 로사가 극의 내용을 즉흥적으로 바꾸고 주어진 역할을 축소해서 극이 전체적으로 허술하고 조잡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블랑카가 쿠타말리의 세 명의 연인들에 대해 하나씩 소개할 때 로사는 이를 동작으로 표현하는데, 물은 바닥에 침을 뱉고, 바람은 하품을 하고, 불은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어 여신이 바람을 취할 때 로사는 관객들에게 씨를 뿌리고, 물을 취할 때는 테이스터들에게 물을 대접하는데, 불과 싸울 때 로사는 블랑카를 빤히 쳐다보면서 한 번 으쓱 하고 만다. 그녀의 성의 없는 연기로 때문에 블랑카는 로사에게 여신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드라마틱한 ‘자기희생’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지만 그녀는 이를 과일을 내리치며 회피하고 극은 결국 시시하게 막을 내린다. 


블랑카의 지시가 관광객의 기대와 관광담론을 대표하는 목소리라면 로사는 ‘전통적’ 제례를 실행해야 하는 ‘원주민’들의 현실이다. 로사는 ‘피의 희생’을 보여주는 퍼포먼스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기를 원하지 않을뿐더러, 퍼포먼스를 제멋대로로 해석하면서 블랑카의 지시는 물론이고 관객들이 기대에 반항한다. <그것들!>은 ‘원주민’들이 ‘자아’와 ‘역할’ 사이의 간극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유머러스하게 풍자하면서 메소아메리카의 전통적 제례를 예상한 관객들에게 실망스러운 연기로 답한다. 더욱이 로사와 블랑카가 싸우는 도중 벗겨진 가발은 이들이 ‘원주민’의 역할을 상연하는 퍼포머였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하며 ‘원주민’으로부터 ‘원주민다운 것’을 분리해낸다. 이처럼 제1부의 제례퍼포먼스는 ‘원주민성’이 서구 관광객들의 구미에 맞춰 상업적으로 기획된 것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원주민들에게 덧씌워진 판타지로서의 원주민성과 현실의 간극을 확인시키면서 식민주의의 판타지를 재탕하는 관광산업과 이에 돈을 지불하는 관광객들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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