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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쎄 Aug 06. 2021

#5. 아파르트헤이트의 여진, <통행권>

코코 푸스코(Coco Fusco, 1960~ )

푸스코는 1997년 열린 제2회 요하네스버그 비엔날레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정면으로 다루는 퍼포먼스 <통행권(Rights of Passage)>(1997)을 기획했다. 


당시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급진적인 변화로 조금은 들뜬 해방의 분위기였지만 여전히 흑인과 백인 간의 긴장 관계가 감지되던 시기였다. 그리고 다인종 사회에서 인종차별이 작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의 국제적인 여파로 마치 모든 지역의 인종차별이 아파르트헤이트와 함께 철폐된 것처럼 인식되고 있었다. 더욱이 푸스코는 가장 끔찍한 역사가 흥미로운 관심의 대상이 되는 동시대의 문화 관광주의에 대한 비평과 함께 모든 종류의 이국성에 대한 말초적인 흥미로 가득한 비엔날레의 새로운 위상에 대한 비평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푸스코는 아파르트헤이트의 핵심적 철학을 보여주는 패스북을 퍼포먼스에 도입하여 창의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했다. 아파르트헤이트 하에서 백인 거주지를 통과하는 모든 흑인과 유색인은 패스북을 반드시 지참해야 했다. 푸스코는 패스북이 과거의 어두운 역사에 대한 반성적인 기념품이 되어 관람객들이 아파르트헤이트를 객관적으로 반추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퍼포먼스는 비엔날레의 모든 방문자들에게 패스북을 발급받게 하고 여기에 전시장 입장 허가 도장을 찍어 전시장 내부를 통행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이었다. 비엔날레 출입구 정문 앞에 임시로 ‘패스북 통제소’를 만들고 푸스코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교통 경찰관 역할을 맡았다. 비엔날레 관람자들은 통제소 부스 뒤에 마련된 즉석사진기에서 사진을 찍은 후 이름, 국적, 민족 등과 같은 기본적인 개인정보에 대한 설문에 답한 후 패스북을 발급 받을 수 있었다. 패스북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사용되던 양식을 그대로 따랐다. 안쪽 페이지에는 개인 정보와 사진을 넣도록 하고 구직 허가여부 등을 기재하도록 했다. 일단 패스북이 만들어지면 입구에 있는 두 명의 흑인 남아프리카공화국 관리인들에게 입장 허가 도장을 받았다. 이들은 아프리칸스 어(Afrikaans)로 방문자들을 적절히 통제하면서 진짜 같은 분위기를 더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퍼포먼스 부스 바로 옆에 “통행권(Rights of Passage), 가변설치(Dimensions variable)" 라는 라벨이 붙어 있었고 관람객들은 푸스코의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할 의무가 없었지만 거의 모든 관람객들은 출입국 통제소에 선 것처럼 심각했다. 개최 당일 많은 사람들은 격분해서 대소동을 피우며 통제소 앞에서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고, 결국 약 700명 이상의 사람들이 패스북을 발급 받았다. 

미술계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은 퍼포먼스가 관람객들을 놀라게 한다며 불평하거나 극도로 화를 냈다. 그리고 교육부서의 대표는 푸스코의 퍼포먼스로 인해 학생들이 큰 상처를 받을 것을 염려해 패스북 통제소로부터 멀리 떨어지도록 했다. 나중에 푸스코가 경찰로써 어떤 권한도 없고, 입장 통제에 대한 어떤 법률적 근거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야 관람객들은 화성인으로, 다색 인종으로, 미지의 부족의 일원으로, 유명한 팝가수 등으로 자신을 표기하면서 퍼포먼스를 즐기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아이처럼 신나하며 소장용으로 패스북을 추가로 요구했고,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다양한 정체성을 모두 기록하고 싶다며 많은 양의 패스북을 요구했으며, 몇몇 예술가들은 자신의 페니스를 위한 패스북을 위해 페니스 사진을 찍기도 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람들의 반응은 보다 진지했는데 비엔날레 전시장을 유지 관리하던 흑인들은 종종 이러한 소동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서 있곤 했다. 특히 백인들이 신분확인을 위해 가로막혀 있는 모습을 볼 때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는 듯 희미하게 웃기도 했다. 반면에 남아프리카의 백인의 대다수는 ‘우리는 이제 모두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람이며 민족이나 인종으로 우리를 분류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어떤 이는 자신들의 문제에 푸스코가 간섭한다며 비난했다. 이렇게 동일한 조건 속에서 누군가는 해방감을 느끼고 누군가는 불편함을 느꼈으며, 제3세계의 국가로부터 제1세계로 이주한 외국인 방문자들은 그들이 차별받은 경험을 털어놓으며 공감을 표현했다.


대다수의 방문자들에게 아파르트헤이트는 함부로 언급해서는 안 될 조심스러운 과거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사고 또한 경직되어 있었다. 퍼포먼스에 대한 방문자들의 반응을 보면 백인과 흑인의 처지가 바뀐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아파르트헤이트는 이미 끝났다고 항변하거나 당황한 모습의 백인들, 이러한 광경을 희미하게 웃으며 지켜보는 흑인들 그리고 불평하는 백인들을 타박하는 흑인 관리자의 목소리와 같은 낯선 광경을 만들어졌다. 인종차별의 주체였던 백인 관람객들은 퍼포먼스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범주화되고 대상화되는 것에 몹시 당황했다. 한 번도 정체성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던 백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이 최초로 위태로워진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퍼포먼스를 실제 상황으로 여기고 불쾌함을 표출하는 모습에서 아파르트헤이트의 패러다임이 그들의 내면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행권>은 백인들에게는 절대적인 응시의 주체로부터 내려와 응시의 대상이 되는 사건을, 흑인들에게는 응시의 대상으로부터 응시의 주체가 되는 상호교차적인 사건을 경험하게 했다. 이처럼 푸스코는 퍼포먼스를 통해서 시선의 위계를 무너뜨리고 흑인과 백인 모두가 응시의 주체이자 대상이 되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리고 패스북으로 대표되는 인종차별의 상징적인 물건은 자유로운 정체성을 새길 수 있는 도구로 재탄생되었다. 실존했던 역사를 모든 방문자에게 직접 경험하게 하고 스스로 재해석하게 함으로써 퍼포먼스는 관람자들을 근본적으로 다른 인식의 차원으로 데려다 놓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패스북에 자신만의 정체성을 자유롭게 기재함으로써 인종과 민족으로 구분되는 정체성의 범주들로부터 벗어났다. 이로써 <통행권>은 과거의 역사를 단지 다시 재상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패스북이 가진 억압적인 상징성을 폐기하고 인종적 위계의 패러다임을 전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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