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제가 살고 있는 곳은 부산이지만 한 번씩 서울 올라갈 일이 있습니다. 면접을 보거나 친구들과 약속이 있을 때도 있어요. 저번 주에는 '서울국제도서전' 공모전에 당선되어 어느 공간에 전시되어 있던 책 '얽힘'을 구경하러도 올라갔었지요. (물론 30개 글 중 하나였어요) 그러면 며칠 머물 곳이 필요하기에 잘 곳을 구하는 것도 나름 일이에요.
다행히도 제가 서울에서 오래 살았었기 때문에 선택지는 몇 군데가 있어요. 사촌동생도 있고 고등학교 친구도 있으며, 전 회사 동료들도 있어요. 하지만 물어보기 전에 조금 고민을 하곤 합니다.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자기 공간을 내주는데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서울 일정이 잡히면 며칠 전에 슬쩍 떠봅니다. "내 서울 올라간다. 좀 재워도"
그러면 특별한 일정이 있지 않는 이상 그들의 대답은 거의 똑같아요. "뭘 그렇게 물어보노. 한두 번도 아니고. 그냥 통보해라. 같이 저녁 묵고 놀자 ㅋㅋ 며칠 있어도 상관없다" 그때마다 전 무한한 고마움을 느낍니다. 아무리 부담 갖지 마라고 해도 부탁하는 제 입장에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사실 부탁이라는 놈은 하는 사람보다 받는 사람이 더 부담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 같아요. 도와주고 싶지만 그러자니 곤란해지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누군가한테 부탁을 했는데 거절을 당하면 '그 사람에게는 무슨 사정이 있나 보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라야 정상인 거예요. 그 사람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부탁할 때 자주 쓰는 단어인 '제발'에 상응하는 영어단어는 please인데, 이 단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탁하는 사람이 어떤 전제조건을 다는지 금방 확인할 수 있어요.
Please는 동사로 쓰이면 '(남을) 기쁘게 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명사 형태인 pleasure는 '기쁨'을 뜻하지요) 그런데 '제발'이라는 뜻과 '기쁘게 하다'가 어떻게 연관된 것일까요? 사실 부탁할 때 쓰는 please는 단순히 한 단어가 아니라 'if it please you', 즉 '이것이 당신을 기쁘게 한다면'의 뜻을 가진 문장의 줄임말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프랑스어로 이에 상응하는 표현도 동일한 형태라는 점입니다. 프랑스어로 please는 s'il vous plait라고 하는데, 이를 영어로 그대로 풀어쓰면 'if it you please'가 되지요. (참고로 우리가 누군가를 파티에 초대할 때 보내는 RSVP는 프랑스어로 Répondez s'il vous plaît의 약자이며, 그 뜻은 "응답해주세요"입니다)
즉, 부탁을 하는 사람이 please라는 말을 쓴다면 그것은 전혀 강요가 아닙니다. 아니, 강요가 되어서는 안 되지요. 본인이 상대방에게 '니가 기꺼이 해줄 수 있으면'이라는 전제조건을 붙여놓고 부탁해놓고, 그것이 거절당했다고 해서 '정이 없다' 혹은 '냉정하다' 등의 평가를 내리면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제가 서울 가서 하루 재워달라고 했는데 그 친구가 사정이 있어서 거절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런데 제가 '치사한 놈. 더러워서 거기서 안 잔다. 내 재워줄 곳 넘쳐난다. 두고 보자'라고 생각하면 그건 너무 이상한 것 아닐까요?
이와 반대로 본인이 부탁을 받는 입장이 되더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받아줄 수 없는 부탁이라면, 아니 그 부탁이 스스로를 굉장히 곤란한 처지에 처하게 만든다면 거절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너무 정이 없어 보이나요? 그래도 냉정한 머리가 따뜻한 가슴보다 더 필요한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경험한 바에 따르면 말이죠. 앞으로 부탁을 하거나 받는 일이 있으면 please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한 번 고심해보기를 바랍니다.
* 참고로 '제발'을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로는 por favor, 이탈리아어로는 per favore라고 하는데, 여기서 por와 per는 모두 영어의 for에 해당하며, favor와 favore는 영어의 favor에 상응합니다. 즉, '호의를 위해'라는 뜻이 되는 것이지요. 이 표현들이 정확히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