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인 모여라

케이오센(京王線) 발차합니다

by 완자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지 반년이 지났다. 연재는 아니지만 매주 금요일 글을 한 개씩 빠짐없이 올리고 있다. 그렇게 반년이 지났건만 눈에 띄는 필력의 상승도 기가 막힌 소재의 발굴도 딴 세상 이야기이다. 꾸준히 글을 쓴다는 것은 모래주머니를 커다란 박을 향해 날리는 것처럼 결국 큰 박이 활짝 열리면서 형형색색의 소재가 내 머릿속으로 쏟아져 내릴 것이라 믿었다. 나는 그저 쏟아져 내린 알록달록한 종이조각을 하나씩 집어 올려 종이에 써진 내용을 그대로 옮기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참으로 어리석었다. (두 번 반복)


쏟아져 내린 종이조각들이 없으니 우선 내가 종이에 쓰고 박에 넣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이를 전문용어로 '정신승리'라고 한다.




서울에서는 3호선을, 도쿄에서는 케이오센(京王線)을 선호한다. (황희정승도 아닌데 무언가 선호하는 것을 밝히는 순간, 상대가 비생물일지언정 혹시 눈치채지는 않았을까 대단히 조심스러운 마음이 든다.) 이유라고 할 것도 없이 가장 많이 이용했기에 다른 노선보다 친근하기 때문이다.


케이오센의 시작점은 신주쿠이다. 출구가 100개 가까이 되니 차라리 지상으로 올라와서 이동하는 편이 미아가 안된다는 악명 높은 곳. 하루 이용객이 350만 명이라는 가늠도 안 되는 곳. 대문자 I타입인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 좋아하는 동네이다. 반복하지만 이유라고 할 것도 없이 가장 많이 이용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흔히 사람이 많은 모습을 '히토고미'라고 표현한다. 일본어가 서툴 때는 히토=사람, 고미=쓰레기. 사람이 쓰레기처럼 지저분한 모습으로 많다 이런 표현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고미는 쓰레기가 아닌 혼잡하다는 코무'混む'에서 온 표현이었다. 사람이 많아 쓰레기처럼 보인다고 한 사람. 누구인가?


짧은 지식은 예상치 못하게 반인류적인 생각을 갖게 할 수 있다.


신주쿠에서 하치오지까지 연결하는 이 기다란 노선은 관광객들은 거의 신세 질 일이 없는 노선이다. 하지만 문구덕후라면 잘 알고 있을 테가미샤(手紙舎)의 본점, 자매점들이 이 노선에 즐비해있다. 츠츠지가오카(つづじヶ丘)본점에는 맛있는 키마카레와 푸딩아라모드가 있고(당연히 문구도 있고 쿠키도 있다), 그 한 개 다음 역인 시바사키(柴崎) 역의 2nd story 테가미샤에는 가장 많은 잡화와 문구가 있으며, 고쿠료(国領) 지점에는 갤러리가 있어 전시를 함께 관람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거기서 살짝 더 이동한 니시쵸후(西調布) 지점에는 1층에는 바가 운영되고 2층은 서점, 문구가 있어 또 다른 매력이 있다. 각 지점의 귀여운 물티슈와 코스터를 수집하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되줄 것 같다.


나는 정말 시간이 없어 한 곳만 가겠다고 한다면 본점을 추천하겠다. (자매점들 잠시 귀를 닫아주세요) 본점 바로 옆 야마모토규뉴텐(山本牛乳店)에는 사악한 가격이지만 맛있는 생우유와 소프트크림 및 디저트들이 있고, 또 그 옆집에는 katakata라는 생활용품점이 있다. 역에서 15분은 걸어야 만날 수 있는 이 세 곳은 구글맵을 보며 어렵게 찾아온 사람들의 지갑을 아주 쉽게 그리고 활짝 열게 해 줄 것이다. 정말이지 칼만 안 든 강도라고 봐도 무방하다.


테가미샤 갤러리가 있는 고쿠료역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독립해 혼자 살았던 곳이다. 2001년 3월 어느 날 홀로 커다란 캐리어를 끌며 새로운 집을 향해 걸어갔었다. 길가 초등학교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목소리와 캐리어바퀴 소리가 섞여 귓가를 맴돌고 살랑이는 바람에 벚꽃잎이 분홍비가 되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제 나 혼자라는 긴장감과 설렘 속에서 앞으로는 햇빛에 반짝이는 벚꽃잎처럼 빛나는 날들만 내 앞에 펼쳐질 줄 알았다.


참으로 어리석었다. (세 번 반복)


얼마 전 오랜만에 다시 찾은 고쿠료역은 주변이 너무 많이 변해 예전 집을 찾아갈 수가 없었다. 도시의 번성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만의 추억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추억을 더듬을 풍경도 사라지고 나이도 들었지만 테카미샤 갤러리가 있는 새로운 모습은 또 다른 내 안의 보물이 되어주었다. 바람이 있다면 올해 처음 열렸던 인벤타리오 문구페어도 테카미샤가 주최하는 카미하쿠(紙博)나 노미노이치(蚤の市)처럼 더 크게 확장되길, 그래서 문구인들이 더 많이 밖에 나와 놀 수 있는 장면들이 늘어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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