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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금태 Jan 30. 2021

빌 에반스_마음의 목소리를 가진 날

Ebony & Ivory, 조화가 만들어낸 기쁨

“오빠도 피아노 한 번 배워보는 건 어때요?”


어느 날, S가 말했다. 오래된 추억이 묻은 S의 피아노 앞에서였다. 내가 악기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아님 교육을 핑계로 나를 혼내고 싶은 것인가. S의 제안에 조금 혼란스러운 마음이 든 날이었다.


어릴 때부터 유일한 낙이 음악을 듣는 거였다. 단골이었던 음반 가게가 있어 거기서 장르 가리지 않고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음악을 많이 듣고 좋아하는 밴드도 있었지만, 악기를 연주해보겠단 생각은 한 적은 없었다. 내 몸 하나 컨트롤 못하는 내가 다른 것을 다루는데 소질이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었다. 악기를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것은 나와 다른 세상 속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사실 악기를 시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처음 친구 방에서 기타를 배운 날, 기본인 C 코드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저주받은 내 손가락 관절을 보며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라 생각했다. 록 기타리스트의 멋짐을 동경했지만, 내가 슬래쉬(Slash, 밴드 Guns N' Roses의 기타리스트)는 될 수 없었다. 그냥 열심히 음반을 사고 음악을 듣는 일. 그것이 내가 음악을 향한 애정을 유일하게 표현하는 일이라 여겼다.

마음의 목소리를 가지게 해준 피아노

그런 내게 S는 다시 한번 태연하게 말했다.

“오빠도 이 참에 피아노 한 번 해봐요? 음… 레슨은 무료, 대신 맛난 거 많이 사줘야 해요”

“그럼 나도 훌륭한 선생님 지도 하에 피아노를 한 번 배워 볼까?!”

너무나 당연한 말투에 나도 모르게 당연한 긍정을 하고 말았다. 그 날 저녁 인터넷 서점에서 성인용 바이엘을 주문했다. 며칠 후 노란색 표지에 검정 글씨로 당당히 바이엘이라 쓰여있는 책을 받았다. 책을 훑어보고 꼬마 피아노 원생이 된듯한 설렘과 이 정도는 금세 정복할 수 있을 것 같은 어른의 교만이 교차하였다.




레슨 첫날.

S에게 이론 수업으로 기본 코드를 배웠다. 메이저가 어떻고 마이너가 어떠며, 서스포에 어그먼트, 디미니쉬까지 S의 열정이 부른 친절한 설명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이보게, 자네 나를 너무 높이 평가하는 것이 아닌가?!’란 말이 목 끝까지 나왔지만, 차마 말은 못 했다. S에게 똑똑한 학생이고 싶었나 보다. 그래도 어려운 코드 수업 후 하나는 기억했다.

C 코드는 도미솔.


코드에 대한 S의 강의를 경청 후, 본격적으로 건반을 터치할 수 있었다. 처음은 오른손과 왼손 양손을 도~솔까지 번갈아 쳐보는 연습이었다.


도. 레.. 미... 파.... 솔..... (오른손 연습)

                  솔..... 파.... 미... 레.. 도. (왼손 연습)


20분 정도 이어진 단순한 연습이 지루해질 때쯤 S는 동요 ‘비행기’ 악보를 내게 그려줬다.

 ‘미레도레 미미미 레레레 미미미 미레도레 미미미 레 레미 레 도~’

입으로 소리를 내며 천천히 8마디를 연주하였다. 누구에게는 단순한 곡일지 모른다. 하지만 처음으로 직접 연주한 나의 첫 곡은 설명할 수 없는 벅참을 안겨줬다. 고작 다섯 손가락으로 조잡하게 내는 소리였지만, 음 하나하나가 조화를 이루니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가슴속 뭉클함이 가득 찼다.

당시 난 항상 마음 깊은 곳 무거운 무언가에 눌려 답답한 상태였다. 이 답답함을 누군가와 이야기하며 그 무게를 나누면 좋았겠지만 그걸  스스로 토로하기에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비행기를 연주한 그 순간은 답답한 무언가를 벗어나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마음속 깊은 가슴앓이를 피아노 건반을 통해 이야기하는 느낌이었다. 마치 검은색과 흰색 건반의 조화를 통해 새로운 마음의 목소리를 가진 기분이 들었다.

비행기를 5번 연습한 날, 받은 칭찬 노트

이 감동에는 물론 옆에서 코드를 치며, 나의 어설픈 연주를 존중해준 S의 도움이 컸다. 하나 분명한 건 이 날에 ‘비행기’는 지금껏 들었던 어떤 음악보다 황홀했다는 것이다.

'음과 음이 만나 조화를 이루니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구나.'

직접 연주를 해보니, 내가 직접 소리를 내는 것은 단순히 음악을 듣는 것과 그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그렇게 S에게 시간이 날 때면 피아노를 배웠다. 대단한 실력 향상은 없었지만 그래도 내가 내는 소리가 좋아 난 피아노와 사랑에 빠졌다.




피아노 레슨 횟수만큼 맛난 음식이 쌓여갔던 어느 저녁, S에게 CD 한 장을 선물 받았다. 재즈 피아니시트 빌 에반스(Bill Evans)의 피아노 솔로 앨범 [Alone]이었다. 앨범을 건네며 내가 그의 앨범이 한 장도 없단 이유도 덧붙였다.

앞 서 말했지만, 난 음악을 좋아한다. 하지만 매니아가 아닌 마니아(많이 아는 사람)의 느낌으로 음악적 정보를 수집하고 기억하는데 주력한 듣기를 그간 해왔다. 그렇기에 빌 에반스란 사람을 얘기할 수는 있었지만, 그의 곡이 지닌 감성적 무언가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걸 알아서였을까. S는 가장 좋아하는 빌 에반스의 앨범 중 하나인 이 앨범을 통해 내가 피아노와 감성적 교감을 하길 바랬던 것 같다.

Bill Evans [Alone] (Verve Records, 1968)

집으로 돌아와 CD 비닐을 뜯고 오디오에 넣었다. 그 날 밤은 그의 연주를 몇 번이고 들은 기억이 난다. 이후 <Here's that rainy day>는 비가 오는 날이면 꺼내 듣는 습관이 되었고, <A Time for Love> 연주에서는 애틋함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꽤 오랜 시간 이 앨범을 들었던 것 같다. 한동안은 앨범에 수록된 <The Two Lonely People(aka The Man and the Woman)>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하였다.

S가 선물한 이 앨범을 통해 난 재즈 피아노 세계에 빠져 들었다. 이후 몇 년간 재즈 피아노 앨범을 스스로 열심히 찾아들었다. 빌 에반스의 지적인 매력과 몽크의 자유분방함, 듀크 조단의 섬세한 터치, 키스 자렛의 아련함 등 다양한 연주자들이 들려주는 마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나도 이들처럼 늦게나마 내 마음의 목소리를 가졌다는 게.  


아쉽게도 S와의 피아노 레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하지만 내게 재즈 피아노를 듣는 재미와 속마음을 대신할 수 있는 피아노란 목소리를 선물해준 S를 난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지금도 가끔 피아노를 친다.


첫 레슨 후 몇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 시간만큼 내 실력은 늘지 않았지만, 느리지만 꾸준히 난 피아노 앞에 앉아 오늘의 내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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