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달한 군고구마 팝니다! 메탈리카 공연표 삽니다!
드디어 수능이 끝났다.
성실한 수험생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3 신분에 충실 여부를 떠나 수능이 끝나니, 하루아침에 할 일 전부가 삭제된 기분이 들었다. 기대했던 해방감 보단 공허감이 컸다고나 할까.
온전히 하루를 100% 자율적으로 쓸 수 있게 되자 24시간이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내가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좋아하는 것도 크게 떠오르지 않았다. 대부분 친구들은 대입 논술 시험 준비에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일찌감치 재수를 결심한 난 그냥저냥 무의미한 하루를 쌓아갔다.
문득 그냥 그렇게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재수를 해야 했지만, 공부에 대한 걱정은 이번 겨울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입시를 준비하는 것은 봄부터 시작될 이야기였다.
한동안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을 매일의 하루가 생겼으니 뭔가 특별한 겨울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졌다. 그렇게 한 겨울의 추억 만들기를 결심한 그 날, 우리는 교실에 모였다.
셋은 머리를 맞대고 며칠간 작당모의를 가졌다. 각자 의견이 분분했지만, 돈 버는 일을 해보자는 것에는 뜻이 맞았다. 누군가 밑에서 돈을 벌기보다는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일을 벌려 돈을 벌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렇기에 학생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애당초 특별한 겨울 이야기 목록에는 없었다.
12월 중순부터 1월 말까지, 약 한 달 반이란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일이자 겨울이란 계절을 이용한 아이템에는 어떤 게 있을까. 순간 머릿속에 번뜩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당시만 해도 찹쌀떡과 더불어 겨울 간식 대명사로 군림하던 군고구마였다. 이번 겨울동안 군고구마 장사를 하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왠지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한 고학생 느낌도 나는 것이 낭만도 느껴졌다. 아이템이 정해지자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수중에 밑천이 없었기에 C의 아버지께 군고구마 통과 재료를 사기 위한 자본금 20만 원을 빌렸다.
당시 고물상에서는 드럼통을 개조한 군고구마 통을 팔았는데, 리어카를 포함해 15만 원에 통을 구입하였다. 시장에 들러 고구마 2박스를 사서 버스에 오른 우리 셋은, 일확천금 꿈에 설레었다. 바야흐로 첫 사업의 시작이었다.
장사는 친구 아버님이 운영하는 채소 가게 옆에서 시작했다. 친구 아버님이 전기를 끌어다 줘 집에서 가져온 카세트로 음악을 들으며 손님이 없는 무료한 시간을 달랠 수 있었다. 당시 메탈 키드였던 우리는 노릇노릇 구워지는 고구마 냄새를 맡으며 좋아하는 음악과 미래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특히 그 겨울, 우리에게 가장 큰 화두는, 메탈 밴드 메탈리카(Metallica)의 4월 첫 내한 공연 이야기였다. 동경하던 메탈리카의 공연을 눈 앞에서 볼 수 있다니, 상상만으로도 너무 가슴이 뛰었다.
우리는 고구마를 판 돈으로 메탈리카 공연을 함께 가자며 의기투합하였다.
하루 수입은 우리 일상처럼 소소했다. 크게 대박 친 날은 없었으나 한 개도 못 팔아 쪽박을 친 날 또한 없었다. 우리 중 장사의 신이 있었다면 큰돈을 벌었겠지만, 큰돈을 벌기에 마냥 순박한 청춘이었다. 고구마는 판매한 양만큼 우리 뱃속으로, 여자 손님들에게 서비스로 나갔다. 결과적으로 장사를 접었을 때, 우린 50만 원 정도의 돈을 벌 수 있었다.
자본금으로 빌린 20만 원을 갚고도 인당 10만 원씩 손에 쥘 수 있었다. 딱 메탈리카 공연을 갈 수 있는 돈이 생긴 것이다. 들인 수고와 품에 비해 큰돈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리는 눈 속에 장작을 때고 시린 손을 호호 불며, 앞으로 펼쳐질 우리의 스무 살 이야기를 함께 나눈 것은 값진 경험이었다.
요즘에야 해외 록 밴드의 내한 공연이 대단한 소식이 아니지만, 당시 메탈리카 내한 공연은 뉴스에 나올 정도의 큰일이었다. 내한 소식에 기독교 단체는 악마를 신봉하는 무리가 한국에 온다며 집단 시위를 벌였다. 메탈은 악마의 음악이라는 잘못된 오해가 부른 해프닝이었다.
이런 해프닝이 계속되니, 국가에서 메탈리카 공연을 막아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IMF로 시끄러워진 국내 상황은 그 의견에 더욱 힘을 실었다. 공연 자체가 취소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겨울 세웠던 우리의 꿈이 이대로 꺼질까 봐 불안한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단골 음반가게 형에게 메탈리카 공연이 취소되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확실한 소식통의 얘기라 했다. 실망과 함께 허무가 밀려왔다.
홧김에 공연표를 사려고 고이 통장에 넣어둔 돈을 찾아 고가였던 메탈리카 라이브 박스 세트를 구입했다. 너무나 갖고 싶었던 물건이었는데, 손에 넣은 기쁨은 그리 크지 않았다. 매일을 비디오를 돌려 보며, 메탈리카를 원망하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메탈리카의 공연이 취소됐다는 것은 루머였다. 메탈리카가 한국에서 꼭 공연을 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드러내며, IMF로 힘든 상황을 고려해 개런티를 대폭 낮췄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결과 4월 이들의 역사적 내한 공연은 정상적으로 진행되게 되었다. 그런데 이를 어쩌냐. 난 이미 공연 갈 돈을 박스 세트를 사는데 다 써버렸는 걸.
공연 성사 소식에 멍해 있는 내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은, 나의 군고구마 사업 파트너였다. 친구들은 고구마 판 돈을 모아 내 표까지 함께 구매해준 것이다. 빛나는 우정에 눈이 멀어버리는 순간이었다.
당시 공연 티켓 구매는 요즘처럼 인터넷에서 쉽게 예매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지정된 예매처로 가서 직접 구입을 해야 했는데, 이게 또 치열한 눈치싸움이 필요한 일이었다. 예매처마다 배분되는 좌석이 달랐고, 빨리 살수록 앞자리를 구입할 수 있기에 우리는 이른 아침 서둘러 서울 대형 서점으로 향했다. 예매처가 클수록 좋은 자리가 많이 있을 거란 계산이었다.
'사'구역이라 적힌 표를 받고 가나다라마바사를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표를 품 안에 고이 넣어 집에 오는 길의 기쁨은 아직도 생생하다.
공연 당일 풍경은 지금도 똑똑히 기억난다. 체조 경기장을 가득 채운 무시무시한 사운드 속 모두가 의자에 올라 발을 동동 구르며 떼창을 하는 모습, 넥타이 부대 아저씨들의 환호와 시종일관 최선을 다하는 우리의 록스타 메탈리카의 멋진 모습까지.
특별한 겨울을 위해 달려온 우리들의 이야기, 최종장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친구들과는 이때 일들을 가끔 안주 삼아 이야기하곤 한다. 어느덧 반복되는 사회생활에 익숙해진 피곤이 얼굴 가득한 나이가 되었지만, 그 겨울을 이야기할 때만큼은 그때와 같은 뜨거운 눈빛을 보인다.
1997년 겨울, 앞으로도 절대 느끼지 못할 우리의 가장 뜨거웠던 그 해의 겨울.
오늘 플레이리스트는 메탈리카다!